서장:
이것이 진정한 철학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
『철학입문』이라는 책을 쓰고 있어서 바쁘다고 말하자 아내는 “당신 어느 새 그런 거창한 책을 쓰는 신분이 된 거야” 하고 대답했다. 실로 그 말대로다. 확실히 거창하게 들린다. 어차피 거창하게 들리니까 이참에 까놓고 말해 두기로 하자. 이 책은 철학의 중핵으로 여러분을 바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와. 말해 버렸다. 그 때문에 이 책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의 본성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 그게 뭐야, 역시 장난치고 있는 거잖아. 그런 것은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이야말로 철학이 줄곧 생각해 온 중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2천 년 이상에 걸친 철학의 역사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역사상 유명한 철학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데카르트도 헤겔도 니체도 후설도 하이데거도 나오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도 데리다도 나오지 않는다. 들뢰즈는 말할 것도 없다(그도 그럴 것이 잘 모르는걸). 이러한 사람들이 어떠한 것을 말했는가를 알기 쉽게 해설하는 유의 ‘입문서’는 지금까지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있다.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그렇지만 그런 건 이제 됐다고 생각한다. 한마디 꺼낼 때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인기가 있었던 시대도 옛날에 끝났기도 하고.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에 이 책에서는 데닛, 밀리칸, 드레츠키, 페레붐 등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철학자들이 언급된다. 이 중에서 데닛은 어쩌면 조금은 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번역도 꽤 돼 있고. 그래도 그 외의 사람들은 그다지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밀리칸이 뭐야, 과자 이름?
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책의 집필 시점에 아직 생존은 물론이고 대활약 중이다. 내가 바로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철학, 즉 과학의 성과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과학적 세계상의 한가운데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철학의 주역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여러분에게 권하는 ‘철학’은 과거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바야흐로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소개할 의도를 갖는 것만도 아니다(물론 소개도 하겠지만). 이 동시대인들의 사유를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의 본성이라는 철학의 중심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시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자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의미’는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런데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대표적인 예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나는 나 자신이 뇌까리고 있는 말에 의미가 있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코딱지를 후비면서 『가장 위험한 유희最も危険な遊戯』의 마쓰다 유사쿠松田優作는 멋있었지 하고 생각할 때 내 마음은 지금은 사망한 마쓰다 유사쿠를 의미하고 있다. 전자 메일로는 의미를 갖는 문장을 보내거나 받고 있다. 역의 홈에 걸려 있는 휴대전화에 가위표가 그려진 기호는 여기서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미는 ‘있을 듯한 것’이기는커녕 ‘당바자’다. ‘당연하지 바보 자식’을 줄인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학교에 가면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는 몇몇 종류의 소립자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배우기도 한다. 내 마음은 마음 밖에 있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는 듯 생각된다. 그렇지만 마음이란 결국 뇌의 작동이에요. 그런데 뇌란 물질이죠. 게다가 뇌의 작동도 결국 복잡한 화학 반응에 지나지 않죠.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라 한다. ‘유물론’이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맑스주의자의 사적 유물론을 가리키게끔 사용되어 왔으므로 “나는 유물론자입니다”라고 하면 “오, 당신은 공산당원입니까?”라는 말을 듣게 되겠지만 유물론은 다음과 같이 훨씬 넓은 입장을 가리킨다.
이 세상은 결국 물리적인 것만으로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따지고 보면 물리적인 것들끼리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은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유물론이다. 그렇다면 현대인 대부분은 이 세상의 양상은 대략 과학이 가르쳐 주는 대로 만들어져 있다는 과학적 세계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한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정도의 차는 있어도 유물론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물론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면 의미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적어도 ‘의미하다’는 물리적 상호작용은 아니지 않을까? 19페이지에 ‘안드로메다 성운’이라는 문자, 즉 잉크의 자국이 있는데 이것은 지구로부터 230만 광년 떨어진 저 성운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잉크 자국으로부터 성운으로 삐삐삐 하고 뭔가가 나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말이 사물을 의미하는 데 230만 년이나 걸려 버릴 거다.
그러면 뭔가가 뭔가를 의미함은 어떠한 것일까? 어떠한 관계일까? 무릇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이유로 일상적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것이 유물론의 안경을 쓰고 이론적으로 반성하면 역으로 ‘없을 듯한 것’,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일상을 무심하게 살고 있을 때에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러한 식으로 ‘당연함’의 근저에는 한 꺼풀 벗겨 보면 터무니없는 불가사의가 숨어 있다. 철학에는 그 불가사의를 드러내는 질문을 묻는 힘이 있다. 이것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도 러셀도 말한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은 의미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정보, 목적, 기능, 가치, 도덕, 의지의 자유, 아름다움, 인생의 의미 등등. 적어도 이런 것들은 중성자, 물 분자, 화강암, 학질모기, 소혹성, 안드로메다 성운이 이 세상에 있는 방식으로는 이 세상에 없다. 색도 냄새도 갖지 않고 질량, 전하 그 외의 물리량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 어디에 짠 하고 있어서 발에 채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만지기도 잡고 던지기도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이것들은 과학이 가르쳐 주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의 기본적인 범위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면 의미란, 가치란, 목적이란 실제로는 없게 되어 버리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것들이 없다는 입장을 관철해서 살기는 매우 어렵고 실제로 없다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 없다.
확실히 과학이 ‘실은 그런 것은 없는 거야’ 하고 가르쳐 준 덕분에 이 세상에서 정말로 없어져 버린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벼락의 신, 여우에게 홀리는 것, 유령, 주술 등등. 이러한 것은 실제로 있다고 생각되었던 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의미, 가치, 목적, 기능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기본 목록에 실려 있지 않다고 해서 그러면 지금부터는 그러한 것은 없다고 합시다라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나의 유물론 선언!
이러한 이유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있는 것’이란 대략적으로 말하면 일상생활을 사는 한 당연히 있다고 생각되지만 과학적·이론적으로 반성하면 실제로는 없는 듯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여기서는 일단 인생에 중요한 유‘사 존재’라 불러 두자.
인생에 중요한 유사 존재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다음과 같이 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우선 세계를 두 개로 나눈다. 물리적 대상과 물리적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세계, 그것과 유사 존재를 포함하는 세계. 후자를 무엇으로 명명할지는 각자의 마음대로이다. 생의 세계, 정신계, 마음의 세계……등등. 그러므로 사물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마음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혹은 해석하는(‘이해함’과 다른 표현을 해 두면 멋있다) 것은 철학 혹은 더 넓게 말해서 인문학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 분할이 가능하면 철학자가 과학을 무시하고 활약할 수 있는 영역이 확보되어 편리하다. 이러한 생각을 이원론이라 한다.
그런데 이 이원론적 영역 분할은 옛날에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이 덜 발달했을 때는 과학이 정신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능력이 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다. 아니, 오히려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자신들의 종교적 분파나 학문적 영역을 사수하고 싶다면 영역을 분할하는 쪽이 여러 의미로 편리하다. 그러나 필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영역이 분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마음의 세계’를 침식하는 능력을 가볍게 보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예전에는 이러한 사람은 그러한 ‘성격’이라든가 ‘인격’의 주인이라고 심적 차원에서 이해·설명되었다. 지금은 아주 평범한 사람도 ‘저 사람은 뇌 내 호르몬 균형이 나쁜 거 아냐?’ 하고 신경과학적 용어로 말을 한다. 머지않아 ‘저 사람은 세로토닌 수용체의 유전자에 변이가 있는 것 아냐?’ 하고 게놈 층위에서 말하게 될 것이다.
우선 세계를 두 만나지 않는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쓸데없고 불건전하다. ‘세계’ 혹은 ‘이 세상’이라 말하는 이상에는 그것들은 하나로 통합되는 쪽이 바람직하고, 세계관은 한 장의 그림이어야 한다. 게다가 사물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를 나눠 두고, 의미와 자유는 심적 세계의 이야기니까 말야, 과학으로는 알 수 없어, 과학은 관계 없는 거지, 이쪽은 철학의 영역인 거야 하고 말하고 두 세계를 멀찌감치 갈라두면 더 이상 아무것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남지 않을 거예요. 나아가 철학 쪽이 아무리 두 세계를 나눠 두고 싶었다 해도 이미 기술했듯이 심적 세계에 대한 과학의 침식은 멈추지 않는다. 이원론적인 사고법은 쓸데없고 어정쩡할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방기이자 시시하고, 게다가 반동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므로 계명戒名은 필요 없다. 유물론자이므로 사물과 물리적 상호작용 외에 의미나 가치나 목적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인생에 중요한 유사 존재가 실체로서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물론자에게는 극히 스릴 있는 과제가 주어지게 된다. 즉 어떻게든지 유사 존재들을 사물뿐인 세계관에 그려 넣는 것. 이렇게 해서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하게 되어 버리는 것들에 대해 역시 어떤 방식으로 ‘있다’고 말해도 좋아요, 혹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방식은 아니지만, 일부만이라면 있어요, 혹은 ‘그건 역시 없지만 대용품이라면 있어요’ 하고 말해 주기. 이것은 재미있는 과제이다.
철학적 ‘과제’란 다소 골칫거리
그런데 이 ‘과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것일까? 유사 존재를 사물뿐인 세계관에 그려 넣는다는 것은 비유일 거다. 유사존재와 유물론적 세계관을 조화시킨다는 것도 모호하다. 더 확실한 질문, 혹은 과제의 형태로 기술해 주지 않을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대답해야 과제에 대한 대답이 되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러한 반박이 들려올 듯하다. 실은 그렇다기보다 담당 편집자로부터 직접적으로 지적을 받았으므로 변명하기로 하자.
그게 말이죠, 철학의 과제란 묻기 시작했던 당초에는 흐릿한 거야. 다의적이고 모호하고 비유적이지. 정의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사물 속에 있는가 마음속에 있는가 등등 말이야. 그 흐릿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는 와중에 최초의 질문이 정확히 어떠한 질문이었는가가 역으로 확실해지는 일이 자주 있어.
유사 존재를 사물뿐인 세계관에 그려 넣으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지. 이러한 문제는 혹시라도 입시에 낸다면 항의를 듣기 십상일 거야. 어떻게 대답하란 말입니까 하고 발끈 화를 낼 거란 말이지. 이러한 이유로 우선 이 질문에 대답하는 대표적인 전략을 세 가지 소개하기로 하자고. 각각의 전략은 이 질문이 어떠한 질문인지, 무엇을 요구받고 있는지에 관한 이해가 달라. 그것을 통해 이 과제가 어떠한 과제이고 어떻게 하면 대답이 되는지를 확실하게 해 두자. 미리 말해 두자면 나는 첫 번째, 두 번째 전략에는 불만이 있다. 이 책은 세 번째 전략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시도해 보고자 하는 책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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