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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기념비적 실패의 공통점
“제가 5대 0 또는 4대 1로 이길 수 있습니다.”
2016년 2월 22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대국장. 이세돌 9단은 2주 뒤에 펼쳐질 역사적 대국을 앞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세돌이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리였다.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이세돌과 알파고 사이에 다섯 차례 대국이 펼쳐졌다. 인공지능과 인류 대표의 승부를 가르는 이 ‘세기의 대결’에 전 세계인의 눈과 귀가 집중되었다. 바둑 한 판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보다 많아서, 바둑은 인공지능이 사람을 능가하기 어려운 ‘인간 최후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세돌 9단이
승리를 자신한 까닭
알파고는 영국의 인공지능 개발 회사 딥마인드가 만든 AI 바둑 프로그램이다. 2016년 1월 딥마인드가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게재하면서 알파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논문에는 2015년 가을 알파고가 유럽 바둑 챔피언인 판후이 2단과 벌인 대국 다섯 판의 기보가 함께 실려 있었다. 5대 0. ‘알파고의 완승’이라는 놀라운 결과였지만 바둑 인구가 적은 유럽에서 비공개로 치러진 승부에 대해 세계 바둑계는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후 구글 딥마인드는 세계 바둑 최고수인 이세돌 9단과의 공개적인 대국을 통해, 세계무대에서 알파고의 바둑 실력을 제대로 검증받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이 근거 없이 알파고를 얕잡아본 것은 아니다. 그는 기보를 통해 알파고의 실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대국을 앞두고 이세돌은 “지난해 가을 열렸던 판후이 2단과 알파고의 기보를 살펴봤는데, 알파고는 아직 나와 승부를 논할 단계의 실력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다시 기자로 현장을 취재하던 필자는 이세돌 9단을 만나, “인공지능 알파고는 사람과 달리 매 순간 진화한다. 다섯 판의 대국을 치를 때마다 사실 이 9단은 매번 더 진화한 알파고와 대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세돌은 “알고 있다. 알파고가 판후이와의 대국 이후에도 계속 개선됐겠지만, 4~5개월이라는 기간은 나와 승부를 펼칠 실력을 쌓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이세돌의 자신감은 알파고의 과거 기보, 그리고 바둑 실력 향상에 요구되는 소요시간을 바탕으로 계산된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1대 4. 이세돌의 패배, 알파고의 압승이었다.
이세돌은 자신의 경험과 바둑계의 상식을 기반으로 실력 향상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학습이 필요한지를 판단했지만, 결정적 패착이었다. 사람을 기준으로 한 계산법이 인공지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국을 통해 확인됐다. 한편 인간 대표가 1대 4로 패배했다는 결과 못지않게 충격을 준 사실이 있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완승을 확신한 상태로 대국에 임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실패
‘마지노 요새’
1940년 5월 10일 독일 나치군이 중립을 선언한 벨기에를 짓밟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서부전선으로 확대됐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저항했지만 패퇴를 거듭했다. 독일군은 한 달 만인 6월 14일 무방비 상태의 파리에 점령군으로 입성했고, 프랑스는 6월 22일 항복을 선언했다.
독일의 침공이 기습적이긴 했지만, 나치 독일이 군비를 증강하며 전쟁 준비를 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또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기 8개월 전인 1939년 9월,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만큼 사실상 두 나라는 이미 전쟁 상태였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치르면서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경험했다. 한 세대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420만 명사망 140만 명, 부상 28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독일의 재침공에 대비해 야심차고 치밀한 국방대책을 세워두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한 치의 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군사력을 강화해 세계 최대의 육군을 보유한 ‘군사강국’이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에 750킬로미터에 이르는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는데, 이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방어 체계의 일환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건설을 주도한 당시 육군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의 이름을 따서 ‘마지노선Maginot Line’으로 불렸다. 1927년부터 10년에 걸쳐 건설된 마지노 요새는 천연지형과 두께 수 미터의 콘크리트 방어벽으로 이어진,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요새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벙커를 비롯해 중무장한 진지, 해자, 대전차 장애물, 연결 터널과 철로 등을 갖췄다. 아무리 강력한 전차부대와 대규모 보병군단의 지상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프랑스가 마지노 요새 건설에 국방비를 쏟아붓느라 공군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이후 마지노선은 절대 뚫려서는 안 되는 최후의 저지선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다. 마지노선은 기대했던 대로 1940년 독일군에 의해 뚫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지노 요새는 군사적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더욱이 프랑스 육군 수십만 병력이 요새에 묶이는 바람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에야 그곳에 있던 병력도 요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를 침공할 때 마지노 요새를 피해 벨기에의 아르덴 고원지대를 통과하는 우회 작전을 선택했다. 아르덴 고원은 산악지형에다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대규모 보병부대가 이동하기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무도 독일의 대규모 전차부대가 아르덴 숲을 통과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의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개선됐고, 나치군은 급강하 폭격기 슈튜카와 무전기를 적극 활용하는 과감하고 치밀한 전격전Blitzkrieg으로 프랑스군의 허를 찔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보병을 중심으로 한 참호전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차와 전투기가 전황을 주도했다. 그사이 무기가 한층 발달하면서 전투 형태와 전략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프랑스군은 과거의 경험과 전략에 기대어 미래 전쟁을 대비했던 것이다. 어쩌면 처참한 패배는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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