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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해가 지고 있었다. 늦가을이었지만 날씨가 따뜻하고, 또 시원한 좋은 날이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그냥 이렇게 해가 또 지는 것이 아까웠다. 내다본들, 해가 늦게 질 리 없건만 창문을 열고 거리에 지는 저녁 빛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길 건너편 사무실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분이 좋은 듯 크게 떠들고 있었다.
“4281년이라고 연도까지 붙여서, 날짜 써주셔야 되고요.”
“오늘 날짜로 ‘해결’이라고 써주세요.”
요즘에는 4281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뒤에 연도를 부를 때 단기檀紀를 쓰라고 했다. 이제 넉 달째이지만,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요즘 한창 경찰이나 기자들을 많이 상대하는 저 사람들이야 꼬박꼬박 4로 시작하는 큰 숫자를 챙기고 있다. 그날은 유독 큰 숫자를 부르는 데서 영예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들은 ‘남선 탐정 사무소’ 사람들이었다. 경찰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 한 명을 붙들어 간 직후였다. 기자들은 경찰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탐정 사무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구경거리인가 싶어 거리의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애들도 있었다. 무엇이든 재미난 것을 보지 못해 지루해 죽을 지경인 이 동네 어린애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다 싶으면 죽은 쥐를 가져가는 고양이에게 돌을 던지며 방해하는 데에도 열을 올렸다. 그 아이들이, 탐정이 붙잡고 경찰에 끌려가는 사람을 보고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남선 탐정 사무소 사람들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백주 대낮 투명화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남선 탐정 사무소 사람들은 건국 원년 도깨비가 저질렀다는 다섯 가지 사건 중에 세 가지를 자기네들이 해결했다고 떠들었다. 사실 말이 도깨비 사건이지, 건국 후에 경찰에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바로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은 뭐든 방치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바로 용의자가 안 잡힌다 싶으면, 신문에서는 그저 뭐든 “수수께끼”니 “불가사의”니 떠들어댔다. 도깨비 사건이라는 것도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이제 가세요. 이게 끝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어떤 사람이오? 더 이야기해주오.”
“어허, 더 이야기해줄 게 없다는 데 그러시오.”
남자는 사건에 대해 묻는 사람들을 귀찮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대답해주고 싶어 하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아이들이나 기자들이 떠드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조용한 가운데에 “도적을 잡았다!” “탐정이다!” 하고 아이들이 내는 소리는 먼 데서부터 메아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길게 비치는 저녁 햇빛이 거리의 소리들을 씻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길바닥과 낡은 건물의 벽에 비치는 붉은 저녁 빛을 보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런 저녁이 영영 다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나 경찰에 붙어먹는 사람들이나, 경찰에 붙어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떠들썩했던 도깨비 사건도 결국 하나하나 풀리고 있었다. 황량한 길에는 정말로 히죽 히죽 웃고 있는 도깨비 하나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에 걸어가도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문에 달린 단추를 눌렀을 때 나는 전기 기계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날쌘 벌레가 내리치는 손을 피하면서 날아오를 때 내는 소리 같았다. 나는 창문을 닫고 문 쪽을 보았다. 창문을 닫는 것만으로 사무실 안은 캄캄해졌다. 그늘진 쪽으로는 캄캄한 밤이었고, 틈새로 새는 빛이 닿는 쪽은 마지막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겉늙어 보였지만 눈빛은 쌩쌩했다. 이런 거리에서 보기 드문 완벽한 양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쪽 눈 아래의 작은 점을 화장으로 살릴 줄 알았다. 얼굴 살갗은 지금껏 평생 단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형편없는 내 사무실 전경을 쓱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하게 멸시를 드러낸 뒤, 내 쪽으로 걸어왔다. 바닥에 구두가 닿을 때 나는 소리가 이미 나에게 말을 뱉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탐정이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두 잔쯤 독한 술을 마신 목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도 손아랫사람을 여러번 부려본 말투의 힘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살인 사건 같은 무서운 단어를 발음할 때에도 변함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겁이라고는 없는 사람 같은 똑떨어지는 머리칼과 옷, 구두 차림이었지만, 입술 안쪽에는 희미하게 겁이 밴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탐정이라고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살인자를 천재처럼 잡아들일 수 있는 탐정은 아니오.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소.”
“그러면 당신도 탐정이라고 명패를 걸어놓고, 부자들과 좌파 단체가 패싸움할 일이 생기면 돈 받고 부자 편들어주는 일을 하오?”
“탐정이라면 그런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판에 먹고사는 수단 아니겠소? 그렇지만 나는 사람 때리는 일은 잘할 줄 몰라서, 그런 일은 안 하니 이런 꼴이오만.”
“그러면 경찰 일을 받아서 하오? 경찰에는 아는 사람이 있소?”
“경찰과는 알고 지내오. 그렇지만 경찰이 부탁해도 사람 때리는 일은 하지 않소.”
나는 내 책상 위를 일부러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보시다시피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 몸이 상하면 먹고 살 길이 없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더 크게 웃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앉을 의자를 내주었다. 그녀가 앉았다.
“경찰에서 사람이 부족해서 못 하겠다는 수사를 당신이 할 수는 있소?”
“누가 살인자인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 살인자가 맞는지 아닌지 캐보는 일은 할 수 있소.”
“그러면 잘되었소. 누가 살인자인 줄은 내가 알고 있소.”
“누구요?”
내가 묻자, 그녀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웃는다면 이 방 안 가득히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깨진 유리잔만큼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백주 대낮 투명화 사건’의 진짜 범인이오.”
그녀가 말했다. 그사이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어 밤이 되어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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