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2017년 1월 17일
햇수로 5년, 근무 연수 3년 11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회사생활에도 징크스라는 게 있다면 외근, 그리고 팀장일 것이다. 외근은 늘 그렇듯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팀장과도 매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팀장과 단둘이 외근을 나가면 크든 작든 꼭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탈 때만 해도 그리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일찍 나선 편이었다. 우리 회사의 중요한 갑甲인 제이마트 본사를 향해 달린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내 오른편에 앉아 있던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다해씨, 제이마트 바로 옆 건물에 원래 강남 쪽에서 유명한 드립커피 전문점 생긴 거 들었어? 거기가 2호점인데 본점보다 더 맛있대. 아주 맛집이래. 줄까지 서서 마신다더라고.”
그가 이어 말했다.
“내가 오늘 미팅 가기 전에 거기 들렀다 가려고 모닝커피도 스킵했잖아.”
팀장은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매일 제각기 다른 브랜드의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 출근했고, 퇴근 전까지 서너잔은 더 챙겨 마시곤 했다. 하지만 오늘도 제이마트 본사 옆에 새로 생긴 까페에서 첫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고, 그건 본인으로서는 대단한 결심이라는 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맛이 좋다고 하니 커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참에 나도 한번 마셔봐야겠다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보니 팀장이 말한 까페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출근 시간대가 아니었는데도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처럼 텐스배리어까지 세워둔 광경을 보고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그러게, 사람이 너무 많은데?”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포된 뜻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빨리 마셔보고 싶네.”
팀장이 대기 줄의 맨 끝에 자리를 잡았다. 미팅 30분 전이었다. 미팅 장소인 제이마트 본사가 바로 옆 건물이긴 하지만 줄이 쉽사리 줄어들 것 같지 않아 걱정이었다. 주문까지는 아슬아슬하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커피를 제조하고 받는 데까지는 또 추가적인 시간이 걸릴 테니까. 한참을 말없이 눈치만 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팅 끝나고 마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이러다가 늦을 것 같은데……”
“괜찮아. 바로 코앞이잖아. 안 늦어, 안 늦어.”
팀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제과회사 다니는 사람이 왜 이런 거에 관심이 없느냐면서 뜬금없이 나를 나무랐다.
“다해씨, 보완재라고 알지?”
제가 설마 그걸 모를까요? 라고 되묻고 싶어졌지만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제과와 커피는 크게는 같은 업계라고. 뭐든 새로 들어오는 거, 잘 나가는 거, 재깍재깍 먹어보는 것도 다 업무의 연장선이라면서 이것도 벤치마킹의 일환이고 시장조사라는 궤변을 덧붙였다. 많이 양보해서 그게 맞는 말이라고 해도 왜 꼭 지금이어야 할까. 휴대폰을 들여다봤더니 벌써 10시 45분이었다.
“팀장님, 15분 전이에요. 꼭 지금 드셔야겠어요?”
“응, 나는 마셔야겠어. 여태까지 줄 선 게 아깝잖아. 거의 다 왔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나고 와도 되잖아요.”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미팅 늦으면 팀장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내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카운터 위에 붙은 메뉴판을 올려다보던 팀장이 뒤돌아 나를 쏘아봤다. 그러고는 코트의 왼쪽 소매를 바짝 걷어올리더니 손목시계를 오른손 검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다해씨, 나한테는 커피가 되게 중요해. 알잖아? 난 이거 마셔야 돼. 지금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카페인 섭취를 못했잖아. 커피 못 마시고 피티 들어가서 내가 말 제대로 못하면, 그러면, 그건 다해씨가 책임질 거야?”
팀장은 직책자다. 직무상의 책임이 있는 자. 말 그대로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게 그 존재의 이유인데 우리 팀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진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무슨 커피 안 마셨다고 말을 제대로 못해? 미팅과 거피, 커피와 미팅. 대체 뭐가 더 중요해?
10시 47분. 커피를 주문했다. 10시 51분. 커피 두잔이 나왔다. 10시 52분. 까페 밖으로 나왔다. 10시 53분. 팀장이 “뛰어!”라고 외쳤다. 10시 54분. 느닷없이 내가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용기의 뚜껑이 열리면서 뜨거운 까페라떼가 왈칵 넘쳐흘렀고, 베이지색 모직 코트의 소매와 아이보리색 울 니트 한가운데와 스웨이드 재질의 부츠 앞코와 노트북 가방 전체를 적셨다. ‘앗, 뜨거!’라는 말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10시 55분. 팀장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칙칙한 손수건을 꺼내 내 노트북 가방을 허겁지겁 닦았다. 그때 팀장의 입에서 나온 “노트북 괜찮겠지?”라는 걱정과 “다해씨는 급한데 이렇게 사고를 치냐”라는 질타를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10시 56분. 제이마트 본사 인포데스크에서 각자의 신분증을 내고 방문객 출입증을 받았다. 10시 59분.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착했다. 목이 타서 뭐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죄다 쏟아버려서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단 한모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11시. 회의실 문을 벌컥 열었다. 팀장은 “안녕하세요, 마론제과 스낵팀장 고대영입니다!”를 외치면서 들어갔다. 마치 무대로 오르는 계단에서부터 인사하는 행사장의 가수처럼.
배 한가운데에 커다란 연갈색 얼룩을 묻히고 우유 비린내를 풍기는 사원과 자기소개를 하며 입장하는 트로트 가수풍의 입장. 우리 회사 영업팀 직원들이 미리 도착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정말로 이상할 뻔했다.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를 겨냥한 이벤트 기획안과 매장 디스플레이 제안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은 무탈히 끝났다. 유명한 커피를 마시면 발표를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던 팀장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팀장이 먼저 한마디 건넸다.
“아까 그 커피 말이야.”
한번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정말 맛있지 않았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다 좋아지더라고.”
기가 막혔다. 3년 11개월 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냥 “네네” 대답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네네”만 반복하며 살다가는 뜨거운 증기를 가득 머금은 밀폐용기처럼 위험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열기가 비집고 나갈 숨구멍 같은 게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 3년 11개월간의 “네네”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그런 구멍은 클 필요도 없다. 아주 살짝, 가느다란 틈새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면 감히 손대기가 두려울 정도로 위태롭게 들끓던 무언가가 그 실금 같은 틈으로 푸슈슈슈, 하는 시시한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간다. 폭발하면 안 된다. 그릇이 깨져서는 안 된다. 나는 “네네” 뒤에 한마디를 힘주어 덧붙였다.
“팀장님 기분이라도 좋으셔서 다행이죠, 뭐.”
그러자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그럼, 다행이지. 다해씨가 아침부터 뚱한 표정 하고 있어서 기분 안 좋을 뻔했는데, 그 커피 마시고 기분 좋아졌잖아.”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확실히 노멀은 아니야. 나는 눈을 흐리게 뜬 채 방긋이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다행.”
“그렇지? 아주 다행이야.”
나는 말없이 팀장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창가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광대의 힘을 뺐다. 억지로 올려뒀던 입꼬리가 중력에 의해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되돌아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한겨울이지만 기온이 제법 올라간 날이었다. 차창 너머의 풍경도 어쩐지 봄처럼 따스해 보였다. 마치 하늘에 구름 한점 없어서 정오의 볕이 도시의 풍경 위로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높낮이가 제각각인 빌딩의 윤곽선도,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새파란 대낮의 하늘도, 가만히 멈춰 있는 듯하지만 공기의 흐름에 따라 이따금 흔들리는 가로수의 얇은 나뭇가지들도, 편한 옷을 입고 밝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나는 행인들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왠지 다들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밑도 끝도 없이 부러워졌다. 나도 지금 퇴근하면 딱 좋을 텐데. 이 택시가 곧장 집으로 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왔습니다, 손님.”
그 말과 함께 눈을 뜨니 택시가 집 앞에 서 있다. 나는 붉은 벽돌 건물 바깥으로 난 철제 계단 난간을 잡고 두칸씩 밟아 2층의 내 방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현관문을 열고, 커피 얼룩이 묻은 코트와 축축한 니트를 벗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다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벌꿀 향이 나는 샤워젤을 샤워볼에 아끼지 않고 듬뿍 짠 다음 물을 살살 묻혀서 거품이 잔뜩 나게 한다. 그리고 천천히 비누칠을 시작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