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역사에서 영원한 것이란 없다. 영원한 것은 단지 그것을 염원하는 인간의 욕망뿐이다. 귀족이 사라지고 시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듯 영원할 것 같았던 양반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나 다 양반이 되면서 사라졌다. 한 사회를 지배했던 상류층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부가 가능한 오래가기를, 그래서 도리 수만 있다면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도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늘어나는 후손만큼 한 가계의 경제력이 확장되지 않을 위험은 언제든지 있었다. 때로는 후손 간의 분쟁이 가계의 존속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하였다.
유럽의 귀족은 일찍부터 부와 권력의 집중을 통해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가계가 지속되기를 염원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장남이었다. 반면에 조선의 양반은 부와 권위를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그들은 균분 상속이 가문의 영속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포기하였다. 그러면서도 장남이 아닌 아들들을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조선 사회는 부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조선의 장자 중심 질서와 상속상의 우대는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근래에 와서야 한국 사회는 균분이라는 과거의 관행을 되살려 놓았다. 이제 한국 사회는 가문의 영속을 염원하지도, 아들 특히 장남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조상이 기대했던 영속에 대한 갈망은 줄어들었지만 부와 권력, 그리고 문화 자본까지 자녀들에게 상속하려는 욕망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마저도 유한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한 집안에서 일어난 상속 갈등을 다루며 그것이 당대의 관행과 제도, 사람들의 인식은 물론 정치권력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다. 아울러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조선 상속제의 변화 양상과 유럽의 상속 현상까지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고문서 연구자들의 손을 거쳐 간 다양한 상속 문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중략)
1
유유의 가출
유유가 일찍이 산에 들어가 글을 읽다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으니 유예원과 백씨는 미쳐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말이 문밖으로 나갔으나 아비와 아내가 그렇다 하니 고향 사람들은 믿고 의심치 않았지만, 오직 유연만은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하였다.
_「유연전」
마음의 병
1556년 대구의 한 양반가에서 가출 사건이 일어났다. 주인공은 유유柳游로 백씨 성을 가진 아내가 있었으며,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유예원柳禮源으로 역시 생존해 있었다. 그의 조부는 사간, 증조부는 승지를 역임하여 이 집안은 지역의 어엿한 양반가의 일원이었다. 유유에게는 형인 치治와 아우 연淵이 있었는데 치는 이미 죽어 유유가 사실상의 장남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가출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유의 가출에 대해 아버지와 아내는 미치광이 병을 앓아서라 했고 동생 연은 집안의 변고 때문이라 했다. 유연은 형의 질병보다 가족 간의 불화를 원인으로 보았다. 「유연전柳淵傳」에서 유유는 가출 동기를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자 아버지는 부부 사이가 나빠서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을 나갔다.”라고 하였다. 유유가 부자 사이는 물론 부부 사이도 원만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유유는 몸이 작고 허약했으며 수염이 없고 음성은 여성 같았다. 이런 신체 특성과 자식이 없다는 서술 때문에 성적 장애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의 내밀한 문제는 확인하기 어려운데, 겉으로 드러난 사실은 그의 정신 장애였다. 국가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유유가 심질心疾, 즉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도 유유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다.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이문건은 기묘사화로 피해를 본 뒤 을사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 유배되어 있었다. 유연은 이문건에게 학문을 익히도록 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수시로 이문건을 찾아 독서와 강론에 참여하였다. 1556년 4월 19일 이문건의 일기에는 유유가 밤중에 몰래 사라져 그를 찾아 나선 동생 연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유연은 이문건의 종손자인 이치백의 말을 빌려 형을 찾아다녔고 다행히도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에 유유는 이미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 이상 증상은 그전부터 시작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날은 연이 유를 발견했지만 이후 유는 다시 가출하였고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장남 치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그 아래 동생 유의 질병과 가출은 이 집안에 드리워진 긴 불운의 전조였다.
유의 가출에 이어 장남 치의 부인이 사망하였다. 유치 부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버지 예원의 처지에서 보면 장남 부부는 죽었고 둘째는 자식도 없이 가출하였으니, 남은 아들은 셋째 연밖에 없었다. 물론 예원에게는 세 아들 외에도 세 명의 딸이 더 있었다. 큰 딸은 왕족인 달성령達城令 이지李禔와 혼인했고, 둘째는 같은 고을의 사족 최수인崔守寅과 셋째는 진주의 사족 하항河沆과 혼인하였다.
하항은 후일 남명 조식의 제자로 이름이 높았고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 건립에 앞장섰으며 이 서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유예원은 딸들을 종친이나 지역의 유명 사족과 혼인시켜 가세를 지켜 나갔던 것이다. 아들 연도 참봉을 지낸 이관李寬의 딸과 혼인하였다. 다만 유의 부인인 백씨는 문인이 아닌 대구의 무인 백거추白巨鰍의 딸이었다. 백거추는 중종 대 여진인이 만포진 첨절제사였던 심사손沈思遜을 기습하여 죽일 때 즉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여 처벌을 받았던 인물이다.
백거추는 무예가 뛰어났지만 이 사건으로 더 출세하지는 못하였다. 그에게는 서자와 딸 둘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유유와 혼인하였다. 백거추의 서자는 경상도 예천에서 수십 명이 작당하여 민가와 수령을 괴롭히고 다닐 때 그 무리의 일원이었다. 이 일은 유유가 가출한 다음 해에 일어났으므로 부인 백씨의 처지에서 보면 시가와 친정 모두 어려움에 부닥쳤던 것이다.
유유가 앓았던 정신적 고통의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심질이라는 마음의 병은 워낙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국왕 명종은 심질이 있는 데다 궁궐에 크게 벼락이 친 뒤로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신하들을 만날 수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선조 역시 신하들과 크게 마찰을 빚을 때 자신은 심질로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으니 제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전교를 내리곤 하였다.
심질은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부터 그로 인해 일어나는 발작까지 다양한 증상에 사용되었다. 때로는 국왕부터 일반인까지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이나 유성룡 같은 이도 심질을 들어 사직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심질은 매우 주관적인 마음의 고통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증상이 심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경우였다. 관원들은 심질이 심하면 탄핵을 받거나 교체의 대상이 되었고, 범죄자는 심질이 인정되면 처벌이 경감되었다.
그런데 유유는 관료도 범죄자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마음의 병은 오직 가족 내부의 문제였다. 유유의 증상은 자신은 물론 가족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나 갈등을 초래할 수 있었다. 특히 상속 같은 이권이 달린 문제나 상장례, 제례와 같은 의례의 시행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심각했다. 장남으로만 가계가 계승되었던 17세기 이후라면 유예원 이후 가계의 대표자는 장남 유치였다. 유치가 아들 없이 죽었더라도 양자를 세워 유예원-유치-양자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권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물론 17세기에도 가계 계승자가 정신 질환을 앓으면 의례 시행의 대표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지는 논란이 되었다. 1673년현종 14 교관을 지낸 민업閔嶪이 죽었을 때 상장례를 주관해야 하는 장남 민세익이 정신 질환이 있어 그의 아들 민신이 대신한 적이 있었다. 민세익의 병을 이유로 아들 민신이 상을 주관하도록 충고한 것은 당대 서인의 실력자였던 송시열과 그의 문인 민정중, 송시열의 손자를 사위로 삼은 박세채 등이었다.
그런데 서인의 또 다른 실력자 김우명金佑明이 송시열과 민신의 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민세익이 질병이 있더라도 자식을 낳고 아버지 상에 슬퍼할 정도의 지각이 있는데, 아들 민신이 그를 대신해 상을 주관한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민신의 행위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인륜의 커다란 변고라는 것이다. 의례의 주관자나 그 내용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는 당대 조선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