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내가 있다
나는 서너 살이다. 창틀에 앉아 있는데, 주위엔 온통 널브러진 장난감들, 거꾸로 처박힌 블록 탑들, 눈이 불거져 나온 인형들. 집 안은 컴컴하고 방마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 흩어지고 있다. 아무도 없다. 다들 떠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점점 사그라드는 그들의 음성, 발소리의 메아리, 웃음소리가 멀어져 가며 계속 귓가에 울린다. 창밖은 텅 빈 정원.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와 조용히 번져 가며, 마치 검은 이슬처럼 만물에 내려앉는다.
가장 끔찍한 것은 정적. 두 눈에 생생히 보이는, 끈적거리는 그것. 차가운 석양, 그리고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나트륨램프의 가녀린 불빛.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둠의 행군은 문밖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떠들썩한 소음이 점차 잦아들면서 어둠의 거죽은 데웠다가 식어 버린 우유처럼 그 빛깔이 더욱 짙어진다. 밤하늘을 등진 채 우뚝 솟은 건물들의 윤곽이 끝없이 뻗어 나가며 모서리와 귀퉁이, 가장자리의 날카로움을 점차 잃어 간다. 꺼져 가는 불빛들이 공기를 앗아 가 숨 쉬기가 힘들다. 어스름이 피부를 파고든다. 모든 소리가 달팽이처럼 제 안에서 웅크리며 더듬이를 거둬들인다. 세상의 오케스트라는 공원 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날 저녁은 세상의 경계선이었고, 나는 혼자 놀다가 그만 우연히 그것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들이 잠시 동안 나를 홀로 남겨 두었기에 그것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덫에 걸려 빠져나갈 수 없게 된 게 분명하다. 나는 서너 살이다. 창틀에 앉아 차갑게 식어 가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다. 학교 주방의 불빛이 꺼졌고 모두 떠났다. 정원의 시멘트 바닥이 어둠에 잡아먹혀 자취를 감추었다. 굳게 닫힌 출입문, 잠긴 쪽문, 가려진 블라인드. 빠져나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었다. 요동치며 선명한 윤곽을 만들어 내는 건 오로지 나의 현존뿐.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순간 깨달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머릿속의 세상
나의 첫 여행은 걸어서 들판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사라진 걸 오랫동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 하는 바람에 제법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공원을 통과하여 시골길로 접어들었고, 옥수수밭과 미나리아재비가 잔뜩 핀 축축한 목초지를 지나 사각형으로 구획이 나뉜 배수로를 거쳐 강가에 이르렀다. 이곳 평야에서 강은 어디에나 있으면서 잔디로 뒤덮인 토양에 스며들고 벌판을 핥는다.
높다란 제방에 올라서면 짜인 틀과 세상에서 벗어나 리본처럼 넘실대며 흘러가는 물길을 볼 수 있었고, 때로는 그 위에서 강 이쪽저쪽을 활주하는 바지선이나 큼지막한 평저선이 보였다. 배들은 강둑이나 나무, 제방에 서 있는 사람들을 그저 자기들의 우아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목격자, 혹은 딱히 주목할 필요가 없는,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되는 일시적인 지형지물 정도로 여겼다. 나는 어른이 되면 그런 바지선에서 일할 수 있기를, 아니 바지선 자체가 되기를 꿈꾸었다.
별로 크지 않은 그것은 오드라강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 역시 작은 아이였다. 강의 위상을 결정짓는 건 크기에 따른 순위다.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그리 대단치 않은 평범한 강이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존 여왕의 궁전에 초대된 시골 자작 부인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충분히 거대했다. 오랜 세월 아무런 속박도 당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흐르고, 범람의 기운이 충만한, 예측 불가능한 강. 강변 근처 어디쯤에서는 물속에 잠긴 장애물이 물줄기를 가로막아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은 유유히 퍼레이드를 하면서 저 멀리 북쪽 어딘가, 수평선 너머에 감춰진 목적지에 집중했다. 강물을 쉼 없이 응시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위쪽으로 옮기다 보면 어김없이 균형감을 잃곤 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스스로에게만 몰두하는 변덕스러운 강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물에는 절대 두 번 이상 몸을 담글 수 없었다.
해마다 강은 자신의 물길에 배를 띄우면서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누군가는 어김없이 강물에 빠져 죽곤 했는데, 무더운 여름날 멱을 감던 아이가 물살에 휩쓸렸고, 어떤 날은 한 취객이 엄연히 난간이 있는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리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익사자를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은 매번 소란스럽게, 또 오랫동안 이어졌고, 인근 마을을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잠수부가 고용되고 해군 경비정이 동원되었다. 몰래 엿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따르면 물에서 건져 낸 시체는 창백한 데다 퉁퉁 불어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물속에 부유하면서 얼굴이 뭉개지는 바람에 가족이나 친지가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이다.
홍수 방지용 제방에 서서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노라면, 아무리 위험해도 정체된 것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지속성보다는 역동성이 한결 가치 있게 느껴졌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고,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예전의 안온한 풍경 ― 공원, 채소들을 초라하게 줄지어 심어 놓은 온실, 그리고 돌을 던져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콘크리트 인도가 있는 나의 풍경 속으로 강이 마치 바늘처럼 선명하게 꿰뚫어 들어온 것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