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손의 백서(白書)
머리와 가슴 사이가 가장 멀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머리와 손 사이가 가장 멀다.
물론 가슴과 손 사이도 멀고
손과 손 사이 또한 멀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이 있다.
그 손을 잡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디지털 단말기가 있다.
내가 단말기를 잡고 있다.
너도 너의 단말기를 잡고 있다.
*
손을 쓰지 않는다.
손 사용법을 잃어버렸다.
손이 도구와 멀어지자 사람이 생명과 멀어졌다.
손이 자연과 멀어지자 사람과 사람 사이도 멀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손은 손사래를 친다 종주먹을 쥔다.
도시에서 손은 나쁜 시그널이다.
누구도 손을 쓰지 않는다.
손이 손을 부르지 않는다.
*
손의 거주지는 한정되어 있다.
손은 제한구역 보호구역 같은 곳에 산다.
마우스 키보드 터치스크린 단말기
핸들 변속기 주변
각종 스위치 버튼 손잡이 일대
화폐 신용카드 지갑 가방 근처
소비의 최초 발생 지점
택배 소포 등기우편 수신처
리비도의 맨 끝 혹은 첫 지점
꿈의 현관 혹은 창문
버릇 습관 강박의 중심
중독의 최전위
욕망의 전방위
증오 저주의 최전방
무관심의 외곽
콤플렉스의 모퉁이
광기의 정수리
망각의 외곽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이 있었다.
사람과 자연 사이에 손이 있었다.
나와 너 사이에 손이 있었다.
*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한때는 손가락 끝이라도 쳐다보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없어지자
달도 지구를 바라보지 않았다.
*
음식과 입 사이에 손이 있다.
지구와 입 사이에 손이 있다.
손이 우주를 몸안으로 모신다.
*
손이 없다고 해서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손이 없으면
손을 달라고 기도한다.
*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
뺨을 맞는 것이 가장 수치스러운 이유는
상대방이 손으로 때렸기 때문이다.
손으로 때렸다는 것은
상대방이 머리와 가슴으로
온몸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누군가 뺨을 어루만져줄 때
온몸의 세포들이 화약처럼 불붙는 이유는
상대방이 손으로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머리와 가슴으로
온몸으로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다닐 때
손바닥을 맞은 적이 있다.
양 손바닥을 펴고 있으면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가벗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을 맞을 때마다
감정선이 깊이 패었을 것이다.
*
간혹 내 손이 내 몸속으로 들어가
심장이나 허파 위 간 십이지장 척추 횡격막 무릎관절 따위를
만져보고 싶어 애를 태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내 손이 나의 엄연한 외부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의 안쪽이 두 손에게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도 내 몸의 바깥 마음의 바깥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 켜진 집에 못 들어가던 신혼 초 어느 날 새벽처럼
정말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
악수는 서로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군사적 행위가 아니다.
악수는 서로 빈손이라는 뜻이 아니다.
악수는 가장 손쉬운 인사법이 아니다.
진정한 악수는 깊은 포옹을 넘어선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
나는 손이다.
나는 손이었고 손이어야 한다.
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에 빼앗긴 몸을 추슬러야 한다.
귀에 빼앗긴 마음을 찾아와야 한다.
수시로 눈을 감아야 한다.
틈틈이 귀를 막아야 한다.
자주 숨을 죽여야 한다.
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손이 손으로
손에게 지극해야 한다.
*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천둥
마른 번개가 쳤다.
12시 방향이었다.
너는 너의 인생을 읽어보았느냐.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어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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