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도 모르는 나
: 감정은 언제나 블랙박스다
A사와 B사는 합작으로 20억짜리 건물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공사 대금의 배분을 둘러싸고 마찰이 생겼다. A사는 B사가 맡은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전체적인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면서 공사 대금을 8대 2의 비율로 나눌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B사는 그 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 회사가 좀 늦기는 했지만, 공사를 모두 마무리했기 때문에 절반씩 나누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두 회사는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법정 소송으로 치달았다. 법원은 7대 3의 절충안을 권고했지만, 두 회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을 달렸고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A사가 대폭 양보하여 6대 4의 비율로 공사 대금을 나누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송 도중 A사 사장의 아버지가 별세하여 예정된 공판이 미뤄졌는데, 소식을 접한 B사 사장이 그 와중에 문상을 갔다. 법정 싸움의 상대이긴 해도 조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A사 사장은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B사 사장을 맞이하며 크게 놀랐다. B사 사장은 조문을 하면서 A사 사장으로부터 그의 부친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B사 사장의 아버지 역시 몇 해 전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B사 사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 자기 아버지가 떠올라 울음을 터뜨렸고, 이에 A사 사장도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았다. B사 사장은 3일 동안 상가를 함께 지키며 장례식까지 참석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A사 사장은 법원의 권고안보다 더 많은 몫을 양보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조우성 변호사의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책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와준 재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례다. 저자가 보기에 두 사장 사이의 갈등은 금전적인 이해관계의 대립만이 아니라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상대방을 제압함으로써 업계에서 자기 회사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어렵다. 결국 이 사건도 법정에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마음이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저자는 때로는 ‘법전法典’보다 ‘심전心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다. 감정은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 감정이 통하면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의 말에는 쉽게 동의가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공적인 조직 경영에 이르기까지 공감 능력은 행복과 성공의 열쇠가 된다. ‘정서 지능’이라는 개념도 널리 쓰인다. 그런데 감정 그 자체는 불가사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감정은 언제나 블랙박스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가족이나 친구의 마음조차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감정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낯선 ‘타자’로 종종 다가온다. 나의 생각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감정에 당혹감을 느낀다. “삶이 벽이나 나무에 의해 드리워진 그물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은 하늘을 나는 새들에 의해 드리워진 그물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감정에 대한 비유로도 읽을 수 있겠다. 끊임없이 바뀌는 새떼의 모습처럼, 감정은 내 안에 있으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기 나름의 의지와 동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듯하다. 예를 들어 입사 동기가 승진했을 때, 이성적으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사람이 더 훌륭하지, 더욱 분발하는 계기로 삼자,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긴 호흡으로 실력을 쌓아가면 돼…… 머리로는 정리가 되었지만,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무리 자신을 다독여도 열등감과 시기심에 잠을 설친다.
인간관계를 둘러싼 감정은 훨씬 더 변덕스럽다. 내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분노인가. 아이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곧이어 후회가 밀려든다. 가족과 사별한 후 그 슬픔을 씻고 일상에 차분하게 복귀했다 싶었는데, 고인의 유품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감정의 돌연변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험으로는 역시 연애가 으뜸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 바로 곁에 미움이 자라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연애 감정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애증의 일체성에 있다.) 그래서 상대방의 태도가 바뀌면 심지어 복수심이 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연인에게 싫증이 나서 헤어질 구실만 찾고 있었는데, 그에게 다른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밤잠을 설친다. 뜻밖의 분노와 질투심에 당황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헤어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이 평온해진 듯했는데, 어느 날 불현듯 생채기가 도지듯 비통함에 시달린다. 웬 감정의 찌꺼기?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는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령 일 년 후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할 수는 있지만, 당장 내일 아침 그 사람을 어떤 감정으로 대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무지하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하버드 대학 경영연구소에서 다양한 임상 사례를 토대로 대화의 원리를 풀어낸 『대화의 심리학』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우리가 처음 가본 도시에 대해 아는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몇 가지 특징적인 구조물 정도는 인식하지만 일상생활의 미묘한 리듬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주요 간선도로는 찾을 수 있지만 진정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뒷골목에 대해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즉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 감정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감정이 스스로를 위장한다는 표현이 흥미롭다. 나 자신과 구별되는 또 다른 생물로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비유다. 의식의 수면에서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이 감정이다. 그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엔진이지만, 그 기본 설계도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 자체가 독자적인 생명체인 듯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심술을 부린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감정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렵다.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뀔 때가 많다.
그렇다고 감정이 완전히 변덕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비합리적인 충동이지만 나름의 패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각광을 받는 ‘행동경제학’은 그런 측면에 착안하여 인간의 의사결정 방식을 추적한다. 행위 주체들이 냉철한 계산으로 자기의 이익을 충실하게 쫓는다는 근대 경제학의 전제가 여기에서는 거부된다.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인 듯하지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다. 거기에는 오랜 관성의 힘이 작용하기도 하고, 인지적인 착각에서 비롯되는 오류가 생겨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탐욕이나 두려움, 선망 등의 감정이 개입하여 엉뚱한 선택으로 이끈다. 게다가 감성을 자극하는 수많은 마케팅 기법들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는다. 상품의 종류가 점점 늘어나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이 쏟아질수록 논리보다 감정이, 이성보다 감성이 더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행위 주체들이 철저하게 손익을 계산하면서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경제, 그 법칙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고도로 정교한 공식을 수립하고 거기에 방대한 숫자를 입력하는 경제학에서 감정이 클로즈업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경제의 규모가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점점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감정의 증폭 효과는 더 커지는 듯하다. 거대하고 난해한 금융 시스템의 정체를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합리적 에너지에 쉽게 휩쓸린다. 주로 카오스 이론에서 연구하는 주제지만, 초기의 미세한 움직임이 커다란 동요를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사태는 앞으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감정을 냉철하게 제어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원치 않는 감정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소마’라는 이름의 묘약을 처방해준다. 그 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슬픔과 고통을 깨끗이 잊고 만족감과 평화로움에 도취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소마가 제공된다. 그러나 그 약효는 감정을 잠시 잊게 해줄 뿐 없애주지는 못한다. 감정은 의식의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함으로써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2.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 북한이 남한을 비난할 때 썼던 표현이다. 대통령의 발언이나 국가의 어떤 정책, 그리고 일부 언론의 논조가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릴 때, 북한은 극심한 인신공격을 받은 듯 격앙된다. 국가 간의 외교에서 이렇게 감정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국제관계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그것은 몇몇 정치 지도자나 외교 전문가들만의 기분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해당 국가 국민들의 일반 정서로 확대된다. 그 가운데는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유발되는 일시적 감정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만성적 감정도 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도미니크 모이시는 『감정의 지정학』이라는 책에서 20세기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정체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글로벌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체성이 불안정해지고 감정이 쉽게 동요되는 상황에 주목한다. 그는 대륙에 따라 공유되는 감정의 색깔을 3등분하여 지정학적으로 분석한다. 두려움에 젖어 있는 서양, 굴욕감에 시달리는 이슬람, 희망에 부푼 아시아라고 지구촌의 정황을 도식화하면서 세 가지 감정의 본질을 대비시킨다.
그러한 감정의 지리학을 통해서 우리는 문명의 흐름을 폭넓게 조감할 수 있다. 특히 이슬람권의 동향을 굴욕감이라는 코드로 풀어내는 접근은 구미 세계와의 긴장과 대립이 왜 자꾸만 격화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유럽보다 한 수 위에 있었던 이슬람권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계사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서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선도하며 자유와 풍요를 구가해온 동안, 이슬람권은 ‘영광스러운 과거’와 ‘좌절된 현재’의 간극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구에 군사적으로 밀리고 문화적으로도 소외감을 느끼면서 자신감에 상처를 입었다. 반면에 서구는 자신의 문명이 쇠퇴일로에 있음을 절감하고 사회 내부에서 빈발하는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외부 세력에 의한 테러에 노출되어 있어서 두려움이 더욱 가중된다. 알카에다 조직의 지도자였던 빈 라덴은 9.11 테러에 대해, 이슬람 세계가 유럽과 미국에게 당한 ‘80년의 모욕과 경멸’을 서양도 맛보게 하는 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국제 정세를 감정의 맥락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해준다. 이는 사회과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사회의 흐름을 포착하려면 감정이라는 요인을 면밀하게 주시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구조와 맞물려 서로를 재생산한다. 일상을 빚으면서 역사를 구성한다.
하지만 서양의 근대 학문은 감정을 소홀히 다뤄왔다. 이성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비합리적인 영역을 외면했다. 그리고 감정을 오로지 개인의 내밀한 문제로만 보았다. 특히 사회과학은 공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를 밝히고 그 질서와 변동을 설명하는 데 주력하느라 사사로운 영역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을 무시했다. 거시적인 구조에 집중하면서 미시 세계에서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마음은 거의 외면했다. 그리고 그것을 생리현상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감정은 생리적인 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풀이될 수 없다. 그것은 일정한 사회와 문화의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작동한다.
사회학자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자살론』에서 논증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감정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는 상당 부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에서 이별의 슬픔을 눈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반대로 축제의 웃음으로 가득 차는 경우도 있다. 노예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뉴올리언스에서는 흑인들의 장례식이 흥겨운 재즈와 발랄한 춤의 행렬로 펼쳐진다.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던 전통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전라남도 진도의 장례식장에서도 우스꽝스러운 춤판과 연극이 벌어지고 구경하던 조문객들의 폭소가 터진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감정이 사뭇 다른 것이다.
감정이 사회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은 역사를 들여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범죄자를 공개 처형할 때 많은 군중이 둘러서서 구경했다. 일제 강점기의 기록 사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는데,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장면이 담겨 있다. 중세 서양에서는 범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할 때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지금 같으면 차마 눈뜨고 못 볼 장면을 축제처럼 즐기기까지 했다. 로마 시대에도 검투사들의 선혈 낭자한 살육 대결을 귀족들은 스포츠처럼 즐겼다. 현대사회의 권투나 이종격투기도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체가 절단되고 고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손뼉 치며 지켜볼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동일한 상황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렇듯 역사를 감정의 프리즘으로 살펴보면 새롭게 포착되는 사실史實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대다수 역사책은 그 부분에 소홀하다. 특히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의 경우, 거창한 정치권력이나 경제 및 신분제도 그리고 사상 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 결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며 일상을 지탱하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사료가 없는 탓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궁중 상황에 대한 치밀하고 방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만, 일반 민중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19세기 말 이후로 넘어오면, 상대적으로 다양한 자료들이 확보되어 당대의 삶과 정서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좀더 용이한 듯하다. 예를 들어 근대 개화기의 신문 논설을 통해 지식인들의 사회 인식을 분석하는 연구가 있다. 당시에 세계의 동향을 주시했던 선각자들은 서양을 보편적인 규범으로 놓고 조선을 비춰보면서 개탄했는데, 거기에 깔린 감정은 수치심과 분이었다고 한다.
서양사에서는 생활사 방면으로 꽤 다양한 연구들이 축적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사회사가 활발하게 개척되었고, 프랑스의 아날학파는 심성사를 기후사, 신체의 역사, 물질의 역사 등과 함께 전체사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대표적인 저술 업적들 가운데 하나로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을 들 수 있다.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아동이라는 세대 범주가 새롭게 등장하고, 그에 상응하는 제도와 문화가 형성되어온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세 서양에서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마땅하다’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흔히 그것을 오해하여, 당시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부모가 자녀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감정 규칙이 성립했다고 아리에스는 분석한다.
이처럼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띤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지고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삶의 바탕이다. 일시적인 파동이 아니라, 장기 지속longue duree의 관성이다. 예를 들어 피부색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보자. 그 기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적어도 1백년 이상 지속된 집단 감정이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변하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반일감정이나 나이에 따른 서열관념 등도 비슷한 정도의 관성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짧은 주기로 변화하는 현상도 많다. 특정 외모에 대한 선망, 동성애나 비혼에 대한 정서적 반응 등이 그것이다.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습속이나 관행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는 문화인류학적인 렌즈와도 일맥상통한다. 당연시되는 감정이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서의 얼개를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감정의 차원에서 새롭게 구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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