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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어 량산보에 오르네
결국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은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피해 초적草賊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곳곳에서 들고일어난 도적 떼가 천하를 횡행하며 사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송사宋史』에는 당시 이들에 대한 기록이 조금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쑹쟝宋江(송강)이 이끄는 무리가 제법 세력이 크고 성대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쑹쟝의 무리가 단순히 허구의 소산이 아니라 실존한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수호지’水滸誌라고 알고 있는 소설 『수호전水滸傳』 역시 『삼국지』와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원래 명칭이 ‘수호전’인 이 소설이 우리에게 ‘수호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삼국지』의 영향인 듯합니다. 『삼국지』가 워낙 유명하고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수호전』이 처음 소개될 때 『삼국지』의 이름을 따라 ‘수호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또 ‘수호전’이라는 제목은 ‘물의 가장자리’水滸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시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周 왕조의 조상인 구궁단푸古公亶父(고공단보)는 당시 왕의 압제를 피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 물가’西水滸로 갔습니다.
길게 뻗은 오이 덩굴이여 緜緜瓜瓞
주나라에 사람이 처음 삶이 民之初生
투수이沮水와 치수이漆水에 터전을 잡음으로부터이니 自土沮漆
구궁단푸가 古公亶父
굴을 파고 지내시어 陶復陶穴
집이랄 것도 없으셨네 未有家室
구궁단푸가 古公亶父
아침에 말을 달려 오시어 來朝走馬
서쪽 물가를 따라 率西水滸
치산岐山 아래에 이르시니 至於岐下
이에 강녀姜女와 함께 爰及姜女
와서 집터를 보시니라 聿來胥宇
-『시경』 「면緜」
바로 그 ‘서쪽 물가’에서 구궁단푸는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뒷날 문왕文王와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기초를 세웠던 것입니다. ‘수호’라는 이름은 이렇듯 부패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떠난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관에서 핍박하여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官逼民反는 근대 이전 중국소설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관념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수호’라는 제목은 기존 사회를 의미하는 ‘물’水을 벗어나 그 ‘언저리’滸를 맴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곧 『수호전』의 주인공이라 할 108명의 호한好漢들은 기존 사회에서 적응해 살지 못하고 량산보梁山泊(양산박)로 쫓겨 올라간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량산보에 오른 이유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저마다 다른데,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가 있는가 하면 강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참여한 이들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무능한 간신들이 권좌에 올라 권력을 농단하고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현실에 염증을 내 량산보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이 기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품고 있던 막연한 불만이 하나의 가치 의식으로 표출된 것이 곧 ‘의리’입니다. ‘의리’는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의 핍박에 대해 호한들이 취했던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만의 배타적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요건을 규정해 주는 가치 규범으로 기능하면서 초기 량산보의 성격을 특징짓는 가치 체계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의리’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출신에 따라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사회적으로 미천한 신분이나 원래부터 암흑세계 출신의 호한들이 말하는 의리는 주로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욕구를 미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어 량산보에 참여한”逼上梁山호한들에게 ‘의리’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공동의 방어막’으로 기능했습니다. 또한 “량산보의 필요에 의해 강압적으로 참여한”梁山逼上이들에게는 ‘현실을 체념하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시켜 량산보에 적응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량산보에 참여한 호한들에게 ‘의리’는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욕구와 현실세계의 적들에 대한 공동의 방어막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기본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호한들의 저항을 정당화시켜 주는 일종의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량산보의 우두머리가 차오가이晁蓋(조개)에서 쑹쟝宋江으로 바뀐 뒤부터 이들은 면모를 일신하고 크게 세력을 떨쳐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쑹쟝은 량산보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무리의 기율도 엄격하게 세워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제 량산보 무리는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라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정치 세력으로까지 그 존재감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량산보는 기존 사회에 대한 저항 이념으로서 개인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의리’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가치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08명의 호한들이 모두 모이자 쑹쟝은 여러 형제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쟝저우江州(강주)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량산보에 오른 뒤 여러 영웅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산채의 주인이 되었소. 오늘 도합 108명의 두령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소. 차오가이晁蓋 형님이 세상을 뜨신 뒤로 인마를 거느리고 산을 내려갈 적마다 내내 무사했는데,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소. 혹 잡혀서 옥에 갇혔거나 혹 상하여 돌아오긴 했어도 모두 무사하여 지금 108명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오. 우리가 전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도처에서 무수한 생령들을 살해했으나 여태까지 공양을 드리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한번 나천 대제(도교에서 거행하는 제사)를 지내서 천지신명의 보우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소. 그래서 첫째로는 여러 형제들의 심신의 안락을 빌고, 둘째로는 조정이 속히 은광을 베풀어 하늘을 거역한 대죄를 사면하고 우리 형제들이 모두 충성을 다하고 서슴없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게 해 주기를 기원하며 …….
-『수호전』 제71회
쑹쟝의 말 가운데 주목할 것은 “조정이 속히 은광을 베풀어 하늘을 거역한 대죄를 사면하고 우리 형제들이 모두 충성을 다하고 서슴없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것을 기원한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량산보에 모인 호한들은 그 전후 사정은 다를지언정 기존 사회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배척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사은을 기다려 대죄를 사면 받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쑹쟝의 말은 어찌 보면 량산보의 존립 근거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충’이라는 것은 당장 눈앞의 이익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직이라는 좀 더 추상적인 존재를 상정한 관념 체계로, 이해 당사자들 간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의리’와 달리 쑹쟝의 말에 나타나 있는 대로 수직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기존 사회를 자발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당한 이들이 모인 량산보라는 집단을 이끌어 간 이념이라 할 ‘의리’와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넘어서 기존 사회에 대한 강한 긍정과 현실세계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충’은 애당초 양립할 수 없는 가치 체계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전환은 량산보의 호한들 중에서도 초기에 참여한 암흑세계 출신 호한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쑹쟝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집단을 이끌었고, 결국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입니다. ‘초안’이라는 것은 나라의 부름에 응한다는 것으로 결국 투항에 다름 아닌 것이니, 이로 인해 량산보 영웅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수호전』의 결말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곧 량산보의 영웅들은 그대로 ‘의리’의 세계에 남으려는 영웅들과 ‘충’의 세계로 편입되고자 하는 영웅들로 나뉘게 되고, 이에 따라 그들 모두는 서로 다른 최후를 맞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의리’를 중심으로 모였던 영웅들이 ‘충’으로 인해 흩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량산보를 형성한 구심력을 ‘의리’로 보고, 량산보 해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원심력을 ‘충’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현실 세계의 모순 극복과 ‘시대적 한계’
한 사람의 의식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언제나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과연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자기가 살면서 접하고 받아들인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유야 어쨌든 량산보는 기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호한들이 모여든 일종의 도피처였습니다. 따라서 량산보에서 지켜지는 윤리 규범은 기존 사회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개인 사이의 은원恩怨에 따른 철저한 보답과 응징을 의미하는 ‘의리’가 집단의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쑹쟝이 량산보에 참여한 뒤로는 오히려 나라에 대한 ‘충’으로 바뀝니다. 곧 개인 지향적 가치 체계인 ‘의리’가 집체주의적 가치 체계인 ‘충’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개인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규범을 내면화해야 한다. 그 결과 개인은 그 집단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계와 세계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 쿨슨·리들, 『사회학에의 접근』(민영사, 1990)
상반된 가치 체계 속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절이 싫어진 중’이 되어 그 집단을 떠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가운데 주류가 된 것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끌려 다니게 마련인데, 바로 여기에 비극의 씨앗이 배태됩니다. 기존 사회에서 배척되어 량산보에 들어온 호한들이 바로 그 기존 사회를 위해 앞장서 싸워야 한다는 이 엄청난 모순적 상황이 작품의 비극적 결말을 예비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배척한 현실 세계의 모순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그 상황을 혁명적으로 돌파할 때에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쑹쟝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자신들을 배척하고 내친 기존 사회에 대해 결연히 칼을 뽑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모순입니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은 나라에 충성을 다해 ‘푸른 역사에 한낱 허망한 이름을 남긴 것’靑史留名뿐이었고, 잃은 것은 개별적 자아의 상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동서고금을 통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재에 항거해 권력을 잡은 이들이 오히려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항상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자기가 살아온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가 하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습을 하다 보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실력이 느는 것처럼, 역사의 발전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항상 봉착하게 되는 ‘시대적 한계’라는 절망적 상황은 결국 역사 발전을 향해 던져진 하나의 밑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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