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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게서 나온 차분한 기운이 내게도 옮겨졌다. 우리는 곧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창 시절, 견진성사 수업 시간, 그리고 방학 중의 그 불행한 마지막 만남까지 기억해 냈다. 그러나 우리 사이를 처음으로 끈끈하게 연결해 준 프란츠 크로머 사건은 이번에도 화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앞날과 관련해서 많은 예감을 담은 야릇한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전에 우리는 데미안이 일본인과 나눈 대화를 시작으로 대학생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곧 그것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문제로 화제가 이어졌다. 물론 데미안의 말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이 시대의 징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디서나 단결을 부르짖는 목소리와 패거리를 짓는 문화만 만연할 뿐 자유와 사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 조합에서부터 합창 모임,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단결해서 만든 것은 모두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포와 두려움, 당혹감이 만들어 낸 공동체이다, 그래서 그 공동체들은 부패하고 낡아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이다.
데미안이 말했다.
“단결은 원래 멋진 거야. 하지만 지금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는 것은 결코 단결이 아니야. 단결은 각자가 서로에 대해 알아 나가면서 새로 생겨나야 해. 그런 단결이라야 얼마간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지금의 단결은 한마디로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각자 같은 편에게 도망을 치는 거지. 왜냐고? 서로 다른 무리가 두려워서 그래. 그래서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뭉쳐. 그럼, 그들은 왜 두려워할까? 이유는 하나야.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 지금 이 사회는 자기 안의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그 사람들도 자기들의 삶의 규칙이 더는 맞지 않고, 자신들이 케케묵은 규범에 따라 살고 있으며, 종교든 도덕이든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유럽은 백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오직 연구만 하고 공장만 지었어.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는 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아도 신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몰라.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을 봐! 아니면 부자들이 들락거리는 유흥지를 봐! 절망적이지! 싱클레어, 그런 것들로는 절대 즐거움을 얻을 수 없어. 겁에 질려 단결한 사람들은 두려움과 적의로 똘똘 뭉쳐 있어. 아무도 타인을 믿지 못해. 그들은 이상도 아닌 이상에 매달리면서,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을 던져. 내 예감엔 조만간 충돌이 일어날 것 같아. 충돌이 생길 거야. 반드시! 내 말을 믿어. 그런 충돌로는 당연히 세계가 개선되지 못해. 노동자들이 공장주를 쳐 죽이고,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어? 주인만 바뀔 뿐이지. 물론 아주 헛되지는 않을 거야. 오늘날의 이상들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지 드러날 테고, 석기시대의 신들도 모두 제거될 테니까. 지금과 같은 이런 세계는 멸망해야 해. 그리고 그렇게 될 거야.”
“그럼 우린 어떻게 돼?”
“우리? 어쩌면 우리도 그 과정에서 파멸하게 될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거든. 하지만 그런다고 우리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아. 우리에게 남은 것들, 혹은 우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 주위로 미래의 의지가 모일 테니까. 그동안 유럽이 기술과 과학에만 사로잡혀 서로 잘났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는 통에 들리지 않았던 인류의 진정한 의지가 드러날 거야. 그리되면 인류의 의지가 오늘날의 그 어떤 사회와 국가, 민족, 단체, 교회들의 의지와는 결코 같지 않았고, 지금도 같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겠지. 게다가 자연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개별 인간 속에, 그러니까 너와 나 속에 쓰여 있어. 예수가 그랬고 니체가 그랬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바로 개인들 속의 그런 것들이고, 그건 당연히 매일매일 달라 보일 수 있어. 만일 오늘날의 사회가 무너지고 나면 그런 개인들의 흐름에 물꼬가 트일 거야.”
우리가 강가의 어느 정원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늦은 시각이었다.
데미안이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곧 한번 찾아와! 우린 항상 널 기다리고 있어.”
나는 서늘해진 밤공기를 가르며 들뜬 마음으로 집까지 먼 길을 걸었다. 도중에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이 고성을 지르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쾌활함과 나의 고독한 삶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자주 느꼈다. 어떤 때는 그들의 그런 면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아냥거리기도 하면서. 그런데 그게 나하고는 얼마나 상관없는 일인지, 그리고 이 세계가 나하고 얼마나 아득하게 동떨어져 있는지 오늘처럼 은밀한 내면의 힘으로 평온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문득 고향 도시의 관료들이 기억났다. 잔뜩 폼을 잡고 다니는 나이 든 신사들이었는데, 이 양반들은 술에 절어서 보낸 대학 시절을 마치 복된 낙원에서 살았던 것처럼 추억하고, 낭만주의자들이나 다른 작가들이 유년기를 향해 찬사를 바치는 것처럼 대학 시절의 잃어버린 ‘자유’를 무슨 위대한 것인 양 떠받들곤 했다. 어디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자유’와 ‘행복’을 과거에서 찾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할지 모른다는, 자신의 길을 가라고 질책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학 몇 년 동안 술을 퍼마시며 환호성만 지르고 살다가 그다음엔 슬그머니 기성 사회로 기어들어 가 공직에 근무하는 근엄한 신사가 되었다. 그렇다. 썩었다. 우리 사회는 썩었다! 대학생들의 저런 어리석은 짓거리도 사회의 다른 수백 가지 어리석음에 비하면 결코 더 크지도 더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갓진 내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눕자 이런 생각은 싹 달아났고, 내 마음속엔 온통 이날이 선사한 그 엄청난 약속에 대한 설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데미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행여 술집을 멀리하건, 얼굴에 문신을 하건, 세상이 썩어 비틀어져 멸망을 기다리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오직 내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깊이 잤다. 마치 축제일 아침처럼 새날이 밝았다. 소년기의 성탄절 축제 이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음이 무척 초조했지만 두렵진 않았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날이 밝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바뀐 느낌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암시를 가득 품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엄숙하게 기다리는 듯했다.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도 아름답고 고요했으며, 축제일에 맞게 진지한 기쁨의 선율로 가득 차 있었다. 바깥세상이 나의 내면세계와 이렇게 완벽하게 일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이날은 영혼의 축제일이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날이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창도, 길에서 만난 어떤 얼굴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원래 그래야 하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일상과 습관의 무미건조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경건히 운명을 맞을 채비를 하고 기다리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큰 축제일의 아침이 꼭 그랬다.
이 세계가 그때처럼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껏 나 자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저 바깥세상은 내게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했고, 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림으로써 저 빛나는 색채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의 자유와 성숙을 얻으려면 그런 정겨운 광채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숙명처럼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의 그 모든 것은 그저 땅에 묻히고 어둠에 덮여 있었을 뿐이고, 어린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대가로 자유를 얻은 사람도 다시 환하게 빛나는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의 시선에 담긴 그 짜릿한 전율을 여전히 맛볼 수 있음을 황홀한 심정으로 깨달았다.
그날 밤 내가 막스 데미안과 헤어졌던 그 도시 변두리의 집을 다시 찾아가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비에 젖어 짙은 잿빛을 띤 키 큰 나무들 뒤에 자그마한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환하고 아늑했다. 큼직한 유리 벽 뒤로 키 큰 화초들이 보였고, 반짝거리는 창문 뒤로는 그림과 책이 있는 컴컴한 벽이 보였다. 현관문은 곧장 작고 따뜻한 홀로 이어졌다. 검은 옷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말수가 적은 늙은 하녀가 나를 안으로 들이더니 외투를 받아 주었다.
하녀는 나를 홀에 혼자 두고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는 즉시 나는 내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문 위의 짙은 색 목조 벽에 검은 테두리의 유리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 눈에 익은 그림 한 점이 눈에 띈 것이다. 황금빛 매의 머리를 가진 새였다. 세계의 껍데기를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바로 그 새였다. 나는 뭉클한 심정으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마치 내가 지금껏 행동하고 체험한 모든 것이 이 순간 대답과 성취가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기쁨과 아픔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동시에 수많은 영상이 전광석화처럼 내 마음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고향집, 아치형 대문 위의 낡은 돌 문장, 그 문장을 그리고 있는 소년 데미안, 사악한 크로머의 마수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소년 시절의 나, 내 작은 방에서 책상에 앉아 조용히 내 그리움의 새를 그리는 청소년기의 나, 스스로 자아낸 실그물에 엉켜 어쩔 줄 모르는 영혼, 이 모든 것, 지금까지의 이 모든 것이 내 속에서 다시 울려 퍼지고 긍정과 시인, 대답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내 그림을 응시하며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내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림 아래 열린 문 사이로 짙은 색 옷을 입은 키 큰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였다.
나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들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은 시간과 나이를 초월해 내면의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이 내게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소망의 실현을, 그녀의 인사는 귀향을 의미했다. 내가 말없이 두 손을 내밀자 그녀는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당신이 싱클레어군요. 바로 알아봤어요. 환영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따뜻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달콤한 와인처럼 음미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눈, 생기 넘치는 성숙한 입, 표식이 또렷한 넓고 위엄 있는 이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평생을 떠돌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녀가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누구도 집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해요. 다만 서로에게 끌리는 길들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온 세상이 잠깐 고향처럼 보이기는 하죠.”
내가 그녀에게로 오는 길에서 느꼈던 기분이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말은 아들과 무척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훨씬 성숙하고 따뜻하고 자명했다. 하지만 막스가 오래전에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도 전혀 장성한 아들을 둔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젊고 달콤했고, 매혹적인 살갗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으며, 입술은 도톰하고 생기가 넘쳤다. 내 꿈속에서보다 한층 위엄과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녀 곁에 머무름은 사랑의 행복이었고, 그녀의 시선은 소망의 실현이었다.
이것은 내 운명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더는 엄격하지도, 사람을 외롭게 하지도 않았다. 아니, 성숙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나는 결심도 맹세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목표에 다다랐다. 내 길의 높지막한 지점이었다. 거기서 보니 앞으로의 길은 넓고 찬란했다. 약속의 땅으로 향해 가고, 나무 그늘이 행복하게 드리워져 있고, 열락의 화원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이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건 세상에서 이 여인을 알게 되고, 그녀의 목소리를 음미하고, 그녀 곁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극히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어머니가 되건 연인이 되건 여신이 되건 상관없었다. 그저 이렇게 존재하고, 내 길이 그녀의 길과 가깝게 붙어 있기만 하다면 충분했다.
그녀가 나의 매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을 받았을 때만큼 우리 막스가 기뻐했던 적은 없었어요.” 그녀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죠. 우린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 그림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싱클레어, 당신이 소년이었을 때 어느 날 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어요. 이마에 표식이 있는 아이를 봤다고요. 그 아이와 친구가 될 것 같다고요.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요. 우리에게 오는 길이 쉽지 않았겠지만 우린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이 열여섯 살 무렵 방학 때 여기 와서 막스를 만난 것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데미안이 그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땐 제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어요.”
“막스가 내게 이런 말을 했죠. 지금 싱클레어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 또다시 사람들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심지어 술집까지 들락거리고 있다, 하지만 결코 사람들 속으로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마의 표식이 지금은 가려져 있지만, 속에서는 그를 불태우고 있다. 그렇지 않았나요?”
“맞아요.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 뒤 저는 베아트리체를 만났고, 이어 또 한 사람의 인도자가 저를 찾아왔죠.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였습니다. 그를 만나고서야 저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왜 막스한테 그렇게 깊이 묶여 있었고, 왜 그렇게 벗어날 수 없었는지를요. 부인, 아니 어머니, 당시 저는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살았어요. 그 길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힘든 건가요?”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공기처럼 가벼운 손길이었다.
“태어나는 건 누구나 어려워요. 당신도 알잖아요?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이제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려웠느냐고. 그렇게 어렵기만 했느냐고. 혹시 아름답지는 않았냐고.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이 있더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치 꿈결처럼 대답했다.
“어려웠습니다.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 꿈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람은 자기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길이 좀 쉬워지죠. 하지만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항상 새로운 꿈으로 대체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어떤 한 꿈에만 매달려서는 안 돼요.”
나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것이 경고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방어막을 치는 것일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목적지가 어딘지도 묻지 않고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 꿈이 얼마나 지속될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영원하길 바랍니다. 저 새 그림과 함께 제 운명이 저를 어머니처럼, 연인처럼 받아 주었으니까요. 제 운명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저의 것입니다.”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 당신은 그 운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녀가 진지한 어조로 내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왠지 모를 슬픔이 가슴 한가득 밀려왔다. 이 황홀한 순간에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도 함께 밀려들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아, 얼마나 오랫동안 울어 보지 못했던가! 나는 몸을 홱 돌려 창가로 걸어가 화분의 꽃들 너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자리까지 가득 찬 와인 잔처럼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리군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해요. 언젠가 당신은 당신이 꿈꾸는 대로 자기 운명의 완전한 주인이 될 거예요. 당신만 변함없다면.”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손을 내밀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내게 친구가 몇 있어요. 아주 가까운 정말 몇 안 되는 친구죠. 그 사람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불러요. 원하면 당신도 그렇게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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