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김지영 씨의 이상 증세가 처음 감지된 날은 9월 8일이었다. 정대현 씨가 정확하게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이 백로였기 때문이다. 정대현 씨가 아침 식사로 토스트와 우유를 먹고 있는데 김지영 씨가 갑자기 베란다로 나가더니 창을 열었다. 햇살은 충분히 눈부셨지만 창을 열자마자 식탁까지 찬 기운이 전해 왔다. 김지영 씨가 어깨를 움츠린 채 식탁으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요 며칠 아침 바람이 쎄하다 싶더니 오늘이 백로였네. 누우런 논에 하아얗게 이슬이 맺혔겠네.”
정대현 씨는 아내의 말투가 왠지 젊은 사람 같지 않아 웃었다.
“당신 뭐야. 꼭 장모님 같아.”
“이제 홑잠바 하나씩 들고 다녀, 정 서바앙. 아침저녁으로 쌀쌀해.”
그때도 정대현 씨는 아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부탁이나 당부를 하실 때면 오른쪽 눈을 조금 찡그리는 것도, 자신을 부를 때 정 서바앙, 하고 방 자를 길게 늘이는 것도 정말 비슷했다. 최근 육아로 지쳤는지 허공을 보며 정신을 놓거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김지영 씨는 원래 밝고, 웃음이 많고, TV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 곧잘 따라해 정대현 씨를 웃기곤 했다. 정대현 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아내를 한 번 안아 주고 출근했다.
그날 밤 정대현 씨가 퇴근했을 때, 김지영 씨는 딸과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엄지를 빨고 있었다. 정대현 씨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한참을 바라보다 아내의 팔을 당겨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김지영 씨는 아기처럼 혀를 살짝 내밀고 몇 번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잠들었다.
며칠 후 김지영 씨는 자신이 작년에 죽은 동아리 선배 차승연이라고 말했다. 차승연 씨는 정대현 씨의 동기고 김지영 씨에게는 3년 선배다. 같은 대학 같은 등산 동아리 선후배인 부부는 사실 대학 시절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학부 이후에도 계속 공부하려 했던 정대현 씨는 집안에 사정이 생겨 계획을 접어야 했다. 3학년을 마친 후 뒤늦게 입대했고, 제대한 후에는 1년가량 휴학하고 부산 집에 내려가 살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동안 김지영 씨가 입학해 동아리 활동을 한 것이다.
차승연 씨가 원래 여자 후배들을 잘 챙긴 데다 김지영 씨와 차승연 씨 모두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 때문에 친해져 차승연 씨가 졸업한 뒤에도 두 사람은 자주 연락하고 만났다. 정대현 씨와 김지영 씨가 처음 마주친 것도 바로 차승연 씨의 결혼식 피로연장이었다. 차승연 씨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 양수색전증으로 사망했는데, 안 그래도 당시 산후우울증을 겪던 김지영 씨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지원이를 재워 놓고 오랜만에 부부가 마주앉아 맥주를 마셨다. 한 캔을 거의 비웠을 즈음 김지영 씨가 갑자기 남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대현아, 요즘 지영이 많이 힘들 거야. 저 때가 몸은 조금씩 편해지는데 마음이 많이 조급해지는 때거든. 잘한다, 고생한다. 고맙다, 자주 말해 줘.”
“이건 또 무슨 유체 이탈 화법이야? 아이고 그래, 잘하고 있다, 김지영. 고생한다, 고맙다, 사랑한다.”
정대현 씨는 귀엽다는 듯 김지영 씨의 볼을 살짝 잡았는데, 김지영 씨가 정색하며 손을 탁 쳐 냈다.
“너, 아직도 내가 한여름에 덜덜 떨면서 고백하던 스무 살 차승연으로 보이는 거야?”
정대현 씨는 잠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 일이다. 한여름 한낮이었고, 햇볕이 무척 뜨거웠고, 손바닥만 한 그늘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였다. 어쩌다 거기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우연히 마주친 차승연 씨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말했다. 좋다고, 좋아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도 더듬으면서. 정대현 씨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차승연 씨는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아, 너는 아니구나. 알겠어. 오늘 얘긴 못 들은 걸로 해. 오늘 일은 없었던 거야. 난 예전이랑 똑같이 너 대할게.”
그러고는 또박또박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이후로 차승연 씨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태연하게 정대현 씨를 대했고, 정대현 씨는 자신이 더위를 먹어 헛 것을 봤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을 아내가 말하고 있다. 무려 20년 전, 두 사람만 아는 어느 볕 좋은 오후의 이야기를.
“지영아.”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대현 씨는 아내의 이름을 세 번쯤 더 불렀던 것 같다.
“그래, 너 좋은 남편인 거 다 아니까 지영이 이름 좀 그만 불러라. 에휴, 짜식.”
술에 취했을 때 차승연 씨의 말버릇이었다. 에휴, 짜식. 정대현 씨는 머리카락이 다 삐쭉 서는 것처럼 두피가 찌릿찌릿했다. 정대현 씨는 애써 태연한 척 장난치지 말란 말만 반복했고, 김지영 씨는 다 마신 캔을 그대로 식탁에 두고 양치도 안 한 채 방에 들어가 딸아이 옆에 누웠다. 김지영 씨는 바로 곯아떨어졌고, 정대현 씨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더 꺼내 단번에 들이켰다. 장난일까. 취한 걸까. TV에서나 나오는 빙의라던가, 뭐 그런 걸까.
다음 날 아침,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어난 김지영 씨는 전날 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대현 씨는 취했더랬나 보다 안심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주사가 있을까 새삼 몸서리를 쳤다. 사실 취해서 필름이 끊긴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고작 맥주 한 캔이었다.
그 이후로도 이상한 징후들은 조금씩 있었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잔뜩 섞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고, 분명 김지영 씨의 솜씨도 취향도 아닌 사골국이나 잡채같은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정대현 씨는 자꾸만 아내가 낯설어졌다. 아내가, 2년을 열렬히 연애하고 또 3년을 같이 산,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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