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페미니즘은 인문학이 아니다?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캠프’에 강의를 갔다. 한눈에 봐도 똑똑해 보이는 여학생이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저는 페미니즘은 인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데, 페미니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면서 갈등을 만들잖아요? 여성주의가 인문학이 되려면, 앞으로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강의하지 말고 나가라는 투로 들렸지만 나는 기분 좋게 응답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인문학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고민할 때, 자신의 성별性別을 모르고 가능할까요? 여성주의는 성별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인간과 사회를 공부합니다. 아, 참 그리고, 이게 가장 잘못 알려진 건데요.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여성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제입니다.” 그 여학생의 의견은 내가 25년 동안 들어 왔지만 늘 친절하게 대답해야 하는 통념이다. 여성주의는 여성 문제만 다루지만(혹은 다루어야 하지만), 인문학이나 다른 학문은 인간을 다룬다는 이야기.
몇 년 전 어느 학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학회를 주도하는 남자 교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지금 탈북자의 80퍼센트가 여성입니다. 젠더의 도입이 시급한 형편입니다(교수는 ‘젠더 도입’을 특히 강조했다). 국제정치학이나 북한학은 그동안 젠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젠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젠더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여성학자 분들을 모시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 생각엔 젠더가 없다고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우려와 달리 서구에서도 국제정치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젠더화된 분야로 유명합니다. 거의 백 퍼센트 젠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젠더가 넘치고 있어요! 국방 용어의 대부분이 젠더 메타포(성별화된 은유)잖아요?”
비슷한 일화는 끝이 없다. 예를 들어, “국문학 학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면 업적 평가 점수를 100점 주어야 하지만 여성학 학회 논문 게재는 (여성은 인류의 반이므로) 50점을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명문대’ 교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인문학적 소양까지 갈 것도 없이, ‘개념 탈출’ 수준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권 침해다. 여성이 반만 인간이라는 발상이라면, 장애 연구 분야인 ‘특수교육학’ 학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면 인구 비율대로 10점을 주어야 할까? 여성이 남성의 반이라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10분의 1에 불과한 인간이란 말인가.
이런 이야기들은 여성주의에 대한 두 가지 지배적 통념을 대변한다. 하나는 젠더에 대한 인식이 없는 성차별주의고, 또 하나는 ‘젠더=여성’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여성주의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생각하기 자체를 차단하는 접근법이다. 구체적으론, 성별에 대한 질문을 불가능하게 하고 여성을 우대하고 배려하고 처리하고 관리하고 차별하는 대상화의 화법이다.
메타젠더란?
영어의 접두사 ‘meta’는 ‘변화, 변성變性, 초월, 한 단계 높은 차원’을 뜻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변화와 성장을 뜻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나 은유를 의미하는 메타포meta/phor는 대표적인 단어이자 ‘메타’의 뜻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메타 인지meta/cognition는 ‘사고 과정 자체에 대한 사고 능력’을 말하는데, 비슷한 원리다. 메타 인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메타는 상태의 변화이되 상태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애벌레가 있어야 나비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애벌레와 나비는 전혀 다른 형태다. 즉 메타젠더는 젠더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고, 인식론으로서 메타젠더는 남녀를 ‘벗어난다’.
메타젠더는 젠더의 필연적 결과이다. 젠더를 가시화하는 작업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여성주의)로 인도하지만, 성별이 그 자체만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사회 현상도, 인간 본성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메타젠더는 근대적 환원론을 넘어서 사회와 젠더를 복합multiple적으로, 혼재fusion상태로, ‘이식異識, hybrid’의 사유로, 다각적으로 사유하려는 인식론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보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인 피억압자 전반을 위한 세계관인 것처럼, 메타젠더는 남편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기존에 구축된 젠더화된 담론 체계를 상대화하고 그 장場 밖의 사고방식을 모색한다. 마르크스는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이 구절을 ‘훨씬 넓게’ 생각한다. 이제까지 언어는 서구 남성들의 것이었다. 모든 언어는 그들의 경험에서 나왔다. 변혁의 실패는 ‘해석만 해서’가 아니라 해석을 독점하여 해석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이 곧 변혁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페미니즘은 여기서 말하는 해석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한국 사회에는 언어가 절실하다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자. 지난 2~3년 동안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고 온라인에서 불어오는 페미니즘 ‘열풍’의 원인은 무엇이고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에 관해 많은 고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대에 여성주의를 접하고 40대를 떠나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여성주의 도서가 일주일에 한 권씩 출간되는 최근의 현상이 반가우면서도 익숙하지 않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서적의 시장 규모는 ‘경제·경영, 자기 계발 분야’에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여성학 책, 그것도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강조하는 내용조차 일 년에 한두 권씩 나왔던 시절에 비하면 놀랄 만한 변화다. 한편, 여성들이 말을 할 때마다 붙여야 했던 ‘접두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시절을 생각하면 불과 10년도 안 된 일이다.
지금 여성들의 당당한 자기 인식의 목소리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의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주도한 여성들은 저항 문화 자체를 변화시켰다. 끈질김과 ‘비폭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국민’에서 ‘여성’, ‘상식적인 시민’, ‘글로벌 마켓의 소비자’로 다양화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저출산을 선택했다. ‘우리’의 고민은 여성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전반적인 여성 의식의 고양이, 어떻게 여성의 실질적인 지위 향상과 사회 정의 실현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여성주의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 즉 ‘여성주의 의식화’가 아니다. 여성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이 곧 여성주의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인간의 사회화 그리고 인식 과정에서, 젠더와 여성주의의 ‘중대한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젠더와 여성주의의 개념과 가치는 사회적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페미니즘은 성별(남성성/여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성별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성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회 문제도 젠더나 계급, 나이 등 한 가지 모순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젠더를 해결하려면 젠더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젠더를 넘어서야 한다. 젠더를 조금이라도 해체하고 무력화해야 한다. 환경 문제가 지구의 ‘책임’이 아니듯, 여성 문제(젠더, 인간을 성별로 구분하는 제도) 역시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 사회가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했고, 그 구별의 권력이 성차별을 가능케 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근원적으로 그 구별(젠더)에 반대하지만, 그 구별이 만들어낸 효과(차별)로서 젠더가 작동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 한편으로는 젠더가 본질적인 구별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젠더로 인한 구분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언제나 ‘차이가 차별이 된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차이와 차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성주의는 인식의 멀티 플레이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난 5년 동안 몇몇 매체에 틈틈이 써온 것이지만, 내게는 ‘전작全作’ 작업과 다르지 않다. 거창하게 말하면, 여성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 대한 나의 탐구이자 나 자신에 대한 심문, 이것이 나의 글쓰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글의 소재는 ‘KTX’에서부터 ‘각자도생 시대의 인간성’까지 다양하지만 일관된 인식론으로 연결되고 있고, 젠더뿐만 아니라 계급, 지역, 나이, 성 정체성까지 다양한 사회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
기존의 지식은 각자 할당된 인식론이 따로 있으면서 동시에 위계적이었다. 북핵 문제, 국가 안보 문제는 정치학의 영역이자 가장 중요하다는 식이다. 혹은 ‘성형 수술은 외모 지상주의’라는 식으로 해석이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의 부재라고 할 수도 있고, 자기 사회를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는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을 외국 이론을 적용하는 장으로 생각하는 식민성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에게는, 한국 사회에는, 언제나 언어가 부족하다. 그것은 인식의 부재, 사유의 부재, 실천의 부재를 의미하고, 이는 곧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좌절과 혼란으로 이어진다.
내가 일상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에는 젠더 문제도 있지만 당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용이 많다. “그 영화의 흥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강의 소설을 어떻게 읽었느냐, 알파고 대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트럼프 당선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을 정신 분석 해보라,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본 소득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내가) 인터넷이나 SNS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즘과 상관이 있는가……” 등등 다양하다. 당연히 사람들은 내가 모든 문제를 다 안다는 가정에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인 나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이 엄청난 진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위에 언급한 이슈들을 기존과는 다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사회 운동, 사회 정의 자체이자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입장은 수많은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다. 모든 시민은 각자 사회적 처지와 위치가 있고, 그 위치에 따른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다른 목소리들이 경합하고 동시에 조화로운 사회. 다르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르게 생각하라”(스티브 잡스)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 경제’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 소양’일 수도 있고, ‘지적인 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주의는 이 과정에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모델로 하는 메타젠더이다. 단언컨대, 여성주의를 모르고 앎을 말할 수 없다. 인류의 반의 경험을 제외하고, 어떻게 인간과 사회를 논하겠는가. 이 책이 젠더라는 렌즈가 인식의 ‘멀티 플레이어’임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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