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과학과 종교의 논쟁에서
실제로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가톨릭 종교재판에서 한 늙은 남자가 “하느님과 성서에 반하는 그릇된 교의를 지지하고 믿은 중대한 이단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문제의 교의는 “태양은 세계의 중심이라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움직이고 있어서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비록 성서에 반한다고 선언되고 정의된 견해라 해도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서 지지하고 변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죄인은 일흔이 된 피렌체의 철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그는 금고형(나중에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을 선고받았고, “건전한 속죄”의 의미로 향후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참회의 일곱 시편을 암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중 『시편』 102편의 신에게 하는 기도에 특히 적절한 구절이 있었다. “그 옛날부터 든든히 다지신 이 땅이, 손수 만드신 저 하늘들이……”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소장인 추기경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선고된 형을 받아들였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맹세했으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이단 행위” ─ 태양 중심적인 우주와 움직이는 지구를 믿은 것 ─ 를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사상가가 성서와 모순되는 천문학을 믿었다는 이유로 가톨릭 종교재판에서 이러한 수모를 당한 일을 누군가가 과학과 종교의 불가피한 갈등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대의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도 서로에 대해 계속해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에는 교회가 아니라 과학이 우세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불가지론자 토머스 헉슬리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에 대한 서평에서 이러한 생각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헤라클레스의 요람 옆에 누워 있는 목 졸린 뱀들처럼, 숨통이 끊어진 신학자들이 모든 과학의 요람 옆에 누워 있다. 그리고 역사는 과학과 종교적 정설이 대립할 때마다 후자가, 파멸하지는 않더라도 피 흘리며 으스러진 채로, 죽지는 않더라도 칼에 베인 채로 목록에서 빠져야 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갈등 이미지는 신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과학과 물질주의의 억압적이고 편협한 세력들에 맞서 자신들의 믿음을 보호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궁지에 몰렸으나 의로운 소수로 묘사했다.
과학과 종교의 전쟁 모델은 널리 퍼져 있고 인기가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학술적인 글들은 주로 불가피한 갈등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쏟아왔다. 곧 살펴보겠지만, 단순한 갈등 스토리를 거부할 만한 타당한 역사적 이유들이 존재한다. 17세기 로마에서 있었던 갈릴레이의 재판에서부터 ‘지적설계’라는 최신형의 반反진화론을 상대로 현대 미국인들이 벌이는 투쟁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는 보이는 것보다 많은 것이 존재하며, 분명 갈등관계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아이작 뉴턴과 로버트 보일 같은 초창기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신의 창조를 이해하기 위한 종교적 사업의 일환으로 보았다. 갈릴레이 역시 과학과 종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세계의 많은 유대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과학과 종교의 건설적이고 협력적인 대화를 지지해왔다.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도 과학적 견해와 종교적 견해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대체로 반박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믿음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보완으로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론 물리학자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S. 콜린스Francis S. Collins, 그리고 천문학자 오언 깅거리치Owen Gingerich다.
그러면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에서 갈등을 완전히 삭제해야 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갈등의 종류를 지나치게 한정하지만 않으면 된다. 용감하고 공정한 과학자가 반동적이고 편협한 교회와 충돌하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편협함도 공정함도 어느 편에나 있는 것이다. 앎에 대한 추구, 진리에 대한 사랑, 수사의 사용, 국가권력과의 낯뜨거운 동거도 마찬가지다. 개인들, 개념들, 제도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각기 다른 짝을 이루어 갈등을 겪거나 화합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뛰어난 과학사가인 존 헤들리 브룩John Hedley Brooke은, 진지한 역사 연구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일반론이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실제 관계는 알고 보니 복잡했다”고 쓰고 있다. 역사적 복잡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들에서 살펴볼 것이다. ‘과학’과 ‘종교’라고 불리는 두 실체 사이의 유일하고 불변하는 관계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는 핵심적인 철학적·정치적 질문들이 몇 가지 존재한다.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의 원천은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인 실재로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종류의 생물인가? 교회와 국가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누가 교육을 통제해야 하는가? 성서와 자연 가운데 어느 것이 믿을 만한 윤리적 길잡이가 될 수 있는가?
과학과 종교에 대한 논쟁들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특정한 종교적 믿음과 과학 지식의 특정한 측면이 지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현대 뇌과학의 연구 결과들과 충돌하는가? 성서에 대한 믿음은 인간과 침팬지가 공통조상에서 진화했다는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가? 기적에 대한 믿음은 물리학이 밝혀낸 엄밀하게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충돌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자유의지와 신의 행동에 대한 믿음이 양자역학의 이론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입증될 수 있는가? 이 장의 제목 ─ 과학과 종교의 논쟁에서 실제로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이기도 한 질문의 한 가지 대답은 이러한 지적 양립 가능성의 문제들이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 작은 개론서에서 내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대에 발생하는 사상들 간의 대결은 훨씬 더 크고 깊은 곳에 있는 구조들의 가시적인 말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책 전체에 걸쳐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과학과 종교에 대해 지금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 지식에 대한 어떤 선입관들이 개입되어 있는지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적 논쟁들에서 언외 의제를 만들어내는 정치적·윤리적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한 개인이 지니는 믿음의 원천으로서의 과학과 종교,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실체로서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들의 종류를 지적하고, 그런 다음에는 학문 분야로서의 ‘과학과 종교’를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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