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평양을 건너 사막에 있는 도시에 갔었다. 좌절했었고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희망보다 더한, 뭔가를 이룰 야망이, 앞서의 삶에서 겪은 좌절을 절멸絶滅시키리라는 야욕野慾이, 몸에서 터져나올 듯하였다. 입에서는 환희가 간혹 흘러 나왔다. 카르타고에 갔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철이 없었다. 지켜보는 이도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
태평양과 이어지는 동해 바닷가 도시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 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을 서둘러 나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라는 허겁지겁만이 전부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 무기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옳겠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絶望,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
2
신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예언적 언사들이 있다. 넘친다. 넘치면, 그것은 착란적錯亂的 언사言辭다. 착란의 배경에는 착각이 있다. 인간의 힘에 대한 착각. 인간은 신 앞에서 할 일이 없다. 해야만 하는 의무도 없다. 날마다 기도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구원의 확신 속에 잠든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뽐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짓에 불과하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기도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신앙은 인간의 앎을 넘어서 있다. 앎을 넘어서 있다. 인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무엇인가 ─ 이 물음은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이 묻고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앙인이 되려고 몸부림치다가, 죽기 직전까지도 참다운 신앙인이 되었는지 의심하다가, 간신히 신앙의 끝에 와본 듯하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선을 긋자. 아니, 거대한 절벽을 세우자. 이쪽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이쪽에서 버둥거린다. 기도도 한다. 열심히 봉사도 한다. 뭔가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을 끝없이 쌓아 올리고 한없이 늘여도 저 선을 넘어갈 수는 없다. 저 절벽을 올라갈 수 없다. 이쪽에 쌓이는 것일 뿐이다. 쌓고 있는, 늘이고 있는 스스로를 보라. 기특한가, 갸륵한가, 보기 좋은가, 모두 헛된 말들. 적절한 표현은 ‘무기력’이다.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한 열등감이나 상대적 괴로움이 아니라 절대적 무기력이다. 무기력 자체이다. 절망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무기력과 절망을 뚜렷하고 냉혹하게 자각할 때, 저 선은 넘을 수 없고 저 절벽은 올라갈 수 없음을 몸에서 알아차릴 때, 비로소 신앙이 시작될 기미라도 보인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므로 그러하다. 신앙이 가능한지, 자신이 신을 믿을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해야만 한다.
더러 누군가 비웃는다. 그러한 선은 없다고, 절벽은 없다고, 인간의 망상일 뿐이라고, 스스로 선을 긋고 그것을 못 넘어간다고 자학하지 말라고, 무거운 돌을 손에 들고 까닭 없이 힘겨워하지 말라고, 그저 내려놓으면 간단할 일을 두고 헛된 힘을 쓰지 말라고, 그런다. 쓸데없는 고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적힌 절대적 무기력의 자각 또한 망상일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하자. 그것을 열어둔 채로, 그것을 인정한 채로 한번 밀고 가보려는 게 지금부터의 일이다. 신을 믿는 종교가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인정하고서,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 물어보려는 것이다.
종교가 환상이라면, 그것에 매달린 인간 자체도 헛된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신을 탐색하는 것은 그것을 탐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을 찾는다. 그러나 신은 보이지 않는다. 숨어 있다. 비교 검증할 데이터가 없으니 신을 만났다는 것을 확인할 도리가 없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 자체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신에 대한 논의를 수없이 해왔다. 그것부터 알고 싶어 한다.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3
서구에서 신에 관한 논의는 ‘아테나이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라는 테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독교의 경전 《신약 성서》〈사도행전〉 17장을 편다. 신에 관한 논의‘들’이다. 그 테제들이 함께 들어 있는 곳이 〈사도행전〉의 이 언저리이다. 테제들은 서로 부딪힌다. 같은 신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다 른 신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말들이 서로 다른 것만은 틀림없다.
골수 유대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로가 아테나이로 선교를 하러 갔다. 바울로는 예수가 살아 있을 때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도使徒, Apostolus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도라 일컬은 사람이다. 그는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 점을 드러내어 밝힌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I 고린토, 15:9). 그가 사도라 자칭할 수 있던 근거는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I 고린토, 15:10). 그가 행한 일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I 고린토, 15:11). 그가 아테나이로 간 것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바울로는 “광장에 나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도 토론하였다”(사도행전, 17:17). 그러다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과도 토론을 하게 되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은 바울로와 토론을 해보고는 ‘이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또 바울로가 예수와 그의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들을 선전하는 모양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사도행전, 17:18).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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