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감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이 흐르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이 흐르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아찔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옛날이야기
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정작 옛날에는 들려주지 못했던 이야기. 오늘날에 와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손이 날아와 입을 틀어막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그 누구도 끝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끝까지 가려던 사람들이 도중에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끝끝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되풀이되는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몰래 전해지던 이야기. 날이 갈수록 점점 은밀해지는 이야기. 누구누구가 죽었을 때에야 희미하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 점점 혐의가 짙어지는 이야기.
내일도 모레도, 네가 여기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살아 있을 이야기. 어떻게든 혼자 있을 이야기. 옛날처럼 멀고 훗날처럼 막연하지만 오늘도 진행되는 이야기. 지하에서 허공에서 더욱 생생한 옛날이야기.
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여기 아직 있어. 여기 아직 그대로 있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이야기. 입을 벌려도 차마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귀를 기울여도 답이 없는 이야기. 마찬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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