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라서 괜찮아
돼지는 말한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나는 더러운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 콧물 안 나오나?
있지, 너 돼지도 우울하다는 거 아니? 돼지도 표정이 있다는 거?
물컹거리는 슬픔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 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안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뒈지는 돼지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뒈지는 돼지다
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랭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묶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q q q q 까마귀가 머리에 올라 앉을 때 돼지가 따라서 우는 소리
q q q q 주인은 감옥 가고 똥물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올 때 돼지가 지르는, 당연히 비명
q q q q 돼지가 돼지가 아니라고 할 때 속으로 외치는 말
q q q q 엄마를 데려갈 때 뒤돌아보는 건 돼지라고 말하는 돼지가 하는 말
q q q q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의 교성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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