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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로 가는 길
옹기장이 막내아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51장 3절│
1951년 9월 15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대구는 평온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후퇴했다. 대구에서는 전투가 없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앞산인 대덕산 자락에 빼곡한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초가집이나마 비바람을 피할 집이 무사한 걸 감사했고,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앉아 피죽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다. 대덕산 소나무숲은 푸르렀고,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은 계산동으로 흘러들었다. 개천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벽돌의 대구대성당(지금의 계산성당)이 있다. 조선시대 끝자락에 대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이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성당이다.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나란히 하늘을 향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종탑에서는 하루에 세 번씩 종소리가 울렸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삼종기도三鐘祈禱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개천 주변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 6시, 정오, 오후 6시에 뎅그렁뎅그렁 울려퍼지는 종소리로 시간을 짐작했다.
대구대성당은 대구 천주교의 중심 성당이라 일요일에는 신자들이 북적였다. 그러나 이날은 토요일인데도 개천을 따라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의 ‘새 신부’가 탄생하는 날이었다. 대구가 고향인 김수환 부제副祭(사제 서품을 받기 전 단계의 성직자)와 왜관 출신의 정하권 부제였다. 서울에서 대신학교(사제가 되기 위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를 다니다 대구에 피난 와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다.
이때는 신학교 과정이 길었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초등학교 5~6학년 과정) 2년, 서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중고등학교, 이하 동성학교) 을조乙祖에서 소신학교 과정 5년, 대신학교 6년, 모두 13년이었다. 이 긴 과정을 마치고 신부가 되는 수는 입학 때의 5분의 1 정도였다. 그런데 김수환 부제는 동창들에 비해 4년이 늦은 17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해방되고는 일본군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괌에 다녀오느라 해방 2년 후에야 귀국했기 때문이다.
김수환 부제의 친가와 외가는 조선 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구교우舊敎友 집안이다. 할아버지 김보현 공은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이고, 어머니와 두 누나는 대구 성요셉성당(지금의 대구 남산성당)의 오래된 신자다. 그리고 셋째형은 해방되던 1945년 12월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동한 신부다. 외할아버지 서용서 공도 박해시대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어머니보다 십수 년 위인 큰외삼촌은 신학교는 못 갔지만 신부처럼 독신으로 신앙생활을 해 ‘서동정徐童貞’이라고 불렸다. 이모들 역시 신앙심이 깊다고 소문난 신자들이었다.
그래서 대구에는 김수환 부제와 집안을 아는 천주교인이 많았다. 그들은 흔치 않은 형제 신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대구대성당으로 향했다.
이때 김수환 부제의 어머니는 69세였다. 열일곱 살에 경상북도 칠곡 장자골 옹기촌에서 옹기를 굽던 서른한 살의 김영석과 혼인을 했다. 서로 다른 옹기촌에 사는 천주교인끼리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후에는 가난하고 서러운 ‘옹기장이’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지만 얻은 건 남편의 해수병뿐이었다. 결국 김수환 부제가 일곱 살이던 22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는 더욱 이를 악물고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두 딸과 네 아들을 키웠고, 그중 셋째아들과 넷째아들을 신학교에 보내 신부가 되게 한 것이다.
옹기장이!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의 자손이나 체포를 피한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천주교 박해가 진행되던 시절이라,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도 신앙생활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산속에 모인 천주교인들은 산비탈에 움막을 만들어 살면서 붉은데기 언덕을 찾아 옹기가마를 만들었다. 그들이 산속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붉은 흙으로 옹기를 만드는 일뿐이었다. 신자들은 구워낸 옹기를 지게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곡식과 바꿨다. 박해에 대한 소문도 듣고 전교傳敎도 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장이’라는 단어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옹기를 구우며 신앙을 지킨 조선시대 신자와, 가난한 옹기촌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근대의 신자를 상징한다. 훗날 그가 아호雅號를 ‘옹기’라고 한 연원이다. 그러나 그는 신앙 선조들에 비해 부족한 게 너무 많다며 가슴속에만 간직했다.
대구대성당에는 신자들과 선후배 신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까까머리 소년 시절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기숙사와 교실에서 동고동락했기에 동창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형제이자 가족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은 서로 반가워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나 평양교구 소속으로 북한에서 사목하다 소식이 끊긴 강만수 신부 등 네 명의 동창 신부들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들 침울해져서 그들의 생사를 걱정했다.
성당 입구에서는 밝은 표정으로 도착한 신자들이 새 신부의 상본을 받느라 북적였다. 어머니와 가족, 일가친척들은 일찌감치 성당 안에 들어가 맨 앞에 앉았다. 그러나 김수환 부제의 셋째형 김동한 신부는 오지 못했다. 해군에 군종신부가 없다는 걸 알고, 참전 중인 해군 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겠다며 지난달에 자원입대했는데, 훈련 기간에는 휴가를 나올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동생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느새 성당 안은 신자들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누나와 이모들은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중앙 통로 왼쪽 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매형과 외삼촌과 이모부 등 남자 친척들은 오른쪽에 앉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지켜지고, 마룻바닥 위에 방석을 깔고 앉던 시절이었다.
김수환 부제는 제의실에서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입당을 기다렸다. 새하얀 장백의長白衣를 입었고, 왼손에는 안수가 끝나면 입을 제의祭衣를 들고 있었다.
대구대성당 제의실 입구에서 서품식 시작과 사제단의 입당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김수환 부제는 잠시 눈을 감으며 심호흡을 했다. 성당 안에는 엄숙한 침묵이 감돌았다. 종소리가 그치자 성가대와 신자들이 부르는 입당성가가 성당 안에 울려퍼졌다. 서품식 주례인 최덕홍 주교와 선배 신부들이 성당 앞쪽 가운데에 있는 제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수환 부제와 정하권 부제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사제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서품식이 시작되었다. 그는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십자가를 메고 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일까, 제대 뒤의 십자가가 유난히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천주님, 제가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김수환 부제는 그리스도를 따라 착한 목자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성당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덕홍 주교가 엄숙한 목소리로 “김수환 스테파노!” 하고 불렀다. 이제부터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신자들의 눈동자가 ‘불림’을 받은 김수환 부제를 향했다.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김수환 부제는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앗숨Ad Sum(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자신을 끊고 십자가와 함께하는 사제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대답이었다. 미사 예절이 라틴어로 거행되던 시절이라 라틴어로 대답한 것이다. 그는 마루에서 일어나 제대 앞으로 나갔다. 신자들은 숨을 죽이고 두 손을 모았다. 어머니는 계속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했다.
최덕홍 주교는 김수환 부제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사제직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를 내려주시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축성 기도였다.
기도가 끝나자 김수환 부제와 정하권 부제는 두 손을 모아 이마를 받친 자세로 마루에 엎드렸다. 부복俯伏은 하느님께 대한 경배 동작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청원을 최고로 표현하는 동작이다. 아울러 세상에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順命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었다.
최덕홍 주교와 성가대가 부르는 성인열품도문聖人列品禱文(지금의 성인호칭기도)의 성스러운 메아리가 성당 안에 울려퍼졌다. 십자가와 엄숙한 기도만의 세계였다. 신자들도 새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늘에 계신 천주 성부님 자비를 베푸소서
세상을 구원하신 천주 성자님 자비를 베푸소서
천주 성령님 자비를 베푸소서
삼위일체이신 천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김수환 부제는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기도문을 들으며 마음을 비워냈다. 그는 지나간 17년의 세월을 반추하면서, 신부가 되는 것을 망설이게 했던 많은 갈등과 시련의 환영들을 하나둘 지워냈다. ‘부족한 내가 어떻게 신부가 되겠느냐’면서 자신을 긁어대던 소심증과 자격지심도 떠나보냈다. 마음속이 고요해지자 그는 기도를 시작했다.
천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무겁고 힘들어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르셨던 십자가에 오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 이 순간 저 자신을 끊습니다…… 천주님, 저 스테파노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성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야고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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