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미국의 뿌리는 어떻게 뽑혔는가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도시들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너무나 많은 나라들이 파괴되고 황폐해졌다. 남녀노소 지위와 관계없이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되고 약탈되었으며 칼로 베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최고의 지역이 진주와 후추 교역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흉측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오, 생각 없는 승리여, 천박한 정복이여.─ 몽테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백인들의 존재가 특이한 것은, 백인들이 그곳에 있게 된 것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든지, 우리는 미국 국민으로서 이곳에서 살려고 의도한 바가 전혀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인도로 가는 여정에 있었던 한 이탈리아인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말해진다. 최초의 탐험가들은 금을 찾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금을 발견하는 행운이 있은 후, 금 찾는 일은 대륙의 더 먼 곳으로 나아가며 계속되었다. 정복과 건국은 19세기 중반까지 대륙 전체의 광풍으로 이어진 금광 탐사에 부수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이 지도상에 표시되면서 산업용품 시장이 곧 프런티어가 되었다. 대체로 우리는 그런 상업적 동기로 초조하고 서두르는 마음을 더하며 스스로 우리 자신의 터전으로부터 내몰려 나왔다. 우리는 거주지를 옮기는 동물 무리처럼 일정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개미 둑을 빠져나오는 개미들처럼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우리 시대만 보더라도 우리는 환상과 탐욕에 물들어 정복자들처럼 고결한 애국심을 앞세운 채 외국을 침략했으며 달을 침범했다.
이렇게 말하면 미국의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역사 기술은 미국 역사의 지배적인 경향에 대해서라면 사실상 맞는 말이다. 일단 미국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나면, 우리는 완전히 담론의 차원으로 올라서서 우리의 모든 조상들과 권력자들을 질타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정성을 잃지 않으려면 다른 경향도 존재해 왔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자리에 그대로 머물고자 하는 경향, “더 멀리 가지 말자. 이곳이 바로 우리가 머물 곳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음성이 존재해 왔다. 지금까지 이런 음성은 주류의 경향이 아니었다. 이런 경향은 화려하게 주목을 끌지도 못했고, 분명한 것은 성공적이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또한 더 오래된 것으로서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인디언들도 물론 인구의 이동을 경험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디언들이 장소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오래된 풍습, 유대감, 전해 내려오는 기억, 전통, 존경심에 기초하고 있다. 땅은 그들에게 고향 땅을 의미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최초의 혁명이자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가장 거대한 혁명은, 땅을 고향 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몰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에는 그곳이 자신들에게 좋은 터전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자리 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예를 들면, 아주 초창기에는 금광 탐사나 인디언들과의 착취적인 교역보다는 농경을 위해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현재 있는 곳에 남아 그곳에서 번성하기를 원하는 가족들과 지역사회는 계속되는 프런티어 확장의 뒤안길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남겨진 자들의 소망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 데에는 거의 체계적인 무엇인가가 작동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자신들이 있는 곳에 남아 번성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집 밖으로 쫓겨나거나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착취되어 몰락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을 찾는 사람들은 정복자가 되어, 이들은 가는 곳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사회를 분열시켜 파괴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파괴한 것은 시대에 뒤처진 촌스러운 것으로서 경멸할 만한 것들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주 이들의 말을 믿었다. 특히 그 피해자들이 다른 백인들일 경우에 그런 일은 더욱 흔한 일이었다.
만약 미국 역사에서 일관되게 작동해 온 어떤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정착민들이나 이들의 지역사회는 오래지 않아 ‘레드스킨’(북미 원주민들을 낮추어 부를 때 쓰는 표현—옮긴이)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정착민들은, 공식적인 인가 아래 정부 보조금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매우 무자비한 착취의 희생자들로 지정되는 것이 미국 역사의 법칙이었다. 인디언들을 쫓아낸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제국 정부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취를 당했다. 그리고 외부의 제국주의를 몰아내자, 이번에는 형태만 바뀐 내부 식민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적인 소농 계급은 산업사회에 의해 착취되었고,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어서 이제는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렀다. 렉싱턴과 콩코드(1775년 미국독립전쟁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매사추세츠 주 소재 지역명—옮긴이) 농민들의 뒤를 잇는 계승자들은 바로 ‘지키기’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의 작은 단체들이다. ‘우리땅지키기 시민운동본부’, ‘계곡지키기’, ‘우리산지키기’, ‘우리강지키기’, ‘우리농토지키기’ 같은 단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전에도 흔히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공식적으로 지정된 희생자들이 존재한다. 소농의 계승자들은 자신들의 터전과 가치와 삶을 지금까지 알아 왔던 방식대로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 역시 세금을 내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나게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기관에 맞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공적으로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공적인 지지자들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희생자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공’하여 착취자 계급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문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유동적’인 존재가 되어, 자신의 삶의 방식이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무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도피는 물론 환상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비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하고 유동성이 강한 사람들일지라도 자신들의 공적인 비즈니스가 배출하는 오폐수와 오염가스를 피해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현 시대 또는 ‘근대’의 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백인들의 존재만큼 오래된 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거의 처음부터 그 악행은 이곳에서 의도적으로 ‘조직’된 어떤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버나드 드 보토Bernard DeVoto는 『제국의 행로』The Course of Empire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세계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시장이었다. (…) 금으로 환산되는 그 가치는 거대한 것이었지만, 신세계가 유럽의 산업체제를 확장시키고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그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드 보토는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간다. “한 유럽인이 처음으로 어느 인디언에게 건넨 휴대용 칼은 히로시마에서 피어오른 버섯구름만큼이나 거대한 전조前兆였다. (…) 그 칼을 받는 순간, 기원전 6000년 시대의 인디언은 자신의 터전 너머에서 7천 5백 년 동안 변화를 거듭해 온 삶의 양식에 단단히 결박되고 말았다. 그것은 더 편리한 삶의 시작이었겠지만, 동시에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유럽인들의 주요 교역물품은 여러 가지 도구들, 직물, 무기류, 장식품, 그밖의 진기한 물건들과 주류酒類였다. 갑자기 이런 물건들을 구할 수 있게 되자, “인디언들의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친”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를 위한 투쟁은 (…) 쉬워졌다. 태곳적부터 쓰이던 수공예품들은 점차 쓸모없는 것이 되어 가다 마침내 버려지고 말았다. 사냥 방법도 변했고, 전쟁 방식과 목적도 바뀌었다. 전쟁의 목적과 장비가 점차 치명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잉여의 여성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결혼 관습까지 변해서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었다. 모피를 마련하는 작업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나게 된 것도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생활상의 변모를 가져왔다. (…) 부, 위신, 명예의 기준도 바뀌었다. 인디언들은 상업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상업을 숭배하는 마음을 키워 갔다. 생활의 유동성과 함께.요약하자면, 변화의 정도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문화의 변화 속도는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문화의 타락으로 인해 삶의 의욕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의 공동체적 모습은 오간 데 없어졌으며, 인격은 파탄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문화적 영향력은 백인이 인디언들을 정복하면서 끼친 다른 어떤 영향보다도 강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 드 보토의 말을 인용한 것은, 그가 인디언 정복과 함께 결코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혁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혁명적 변화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혁명적 상황은 소농과 농촌 사회, 온갖 종류의 지역 소상인, 독립적인 장인들의 작업장, 그리고 시민들의 가정에 사실상 똑같은 재앙을 가져왔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혁명이다. 현재 우리의 경제는 아직도 모피 교역을 하던 당시의 경제와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상업물품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테크놀로지, 무기, 장식품, 진기한 물품, 의약품의 교역이 우리 경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큰 차이는, 혁명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소비자는 이제 의류, 주거, 식품, 심지어는 물과 같은 생활필수품에 대해 독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평균적인 사용자들이 아직 독자적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생활필수품’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공기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오염이라는 방식으로 공기의 사용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상업적 정복은 군사적 정복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결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인디언이 ‘레드스킨’이 된 것은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산업 제품을 생활필수품으로 삼게 만드는 교역업자들에 대한 의존 상태를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혁명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우화이다.
드 보토가 분명히 밝힌 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인디언들에게 강요한 이런 착취적인 산업경제로 인해서 제국주의 세력들의 명분 자체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지역이었던 뉴프랑스의 부富의 5분의 4 이상은 모피에서 창출되었고, 나머지는 어업에서 나왔다. 농업을 통해 창출되는 부는 없었다. 프랑스 왕실의 식민정책은 뉴프랑스가 농업을 발전시키길 원했지만, 왕실의 경제는 식민지의 모피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전체의 유익을 거스르는 경제였다.” 루이지애나를 (농업 등 여러 면에서) 발전시키려는 프랑스 탐험가 라살La Salle의 꿈은 좌절되었는데, 그 이유는 “루이지애나를 식민화시키는 과정에서 프랑스 왕실의 이해가 멕시코 북부의 은광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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