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집
닝을 처음 만나던 날, 도서관 바깥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닝이 앉아 있는 책상 뒤쪽으로 내 키보다 훨씬 큰 책장들이 줄느런히 서 있었는데 책장들이 끝나는 곳에는 흰 벽 대신 바깥을 그대로 내다볼 수 있는 통유리 창문이 있었다. 바깥 하늘에서 추적이는 빗방울들과 복제품처럼 모양이 꼭 같은 검은 책장들, 그 책장 앞에 간간이 서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닝의 등 뒤로 펼쳐져 있어서 전체 분위기가 르네 마그리뜨의 「골꽁드」처럼 묘했다.
그날 내가 빌린 책은 무엇이었던가. 아마 대만 일러스트 작가 지미의 책이었던 것 같다. 닝은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진 뒤표지에서 도서관 바코드를 찾아내 딸깍딸깍 자판을 두드리며 일련의 숫자들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내미는 책을 상대해야 하는 닝은, 많이 지친 듯 보였다. 내 뒤에 섰던 학생이 자기의 책을 내밀 때 나는 옆으로 물러나서 내 책을 돌려줄 닝을 기다렸다.
닝에게서 책을 넘겨받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나는 급히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그래, 알았어. 어, 어…… 조용한 도서관에서 내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나는 되도록 짧게 통화를 끝냈다. 닝은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전화를 받는 내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한국어과 선생님인가요?
그뒤로도 몇 번인가 책을 더 빌리고 나서, 어느날 닝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즈음 닝이 일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뛰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강사들한테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사무실 구석자리 같은 곳을 제공하지 않았다. 때로 교통상황이 좋아 버스가 예정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할 때면 나는 차라리 도서관에서 수업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안면이 익어지고 보니, 닝은 나랑 같은 학교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있었다. 내가 오르고 나서 버스가 두 번쯤 더 사람을 태운 뒤, 그 다음 간이역이 닝이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버스를 올라탈 때의 닝은 쾌활하고도 스스럼없었다. 아침을 먹지 못하고 나오는지 닝은 자주 한 손에 계란빵이나 찹쌀지짐이 같은 것들을 싸들고 올라왔다.
─어, 그, 한국어 선생님이네……
닝은 다른 자리에 앉은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지나가다가 차체가 심히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내 옆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인…… 인가요?
계란빵을 다 먹고 나서 자일리톨 껌을 꺼내 씹으며 닝이 그렇게 물었다. 어딘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니죠. 중국이에요, 조선족.
내 말에 닝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중국말 잘하신다 했어요.
가까이에서 본 닝은 갸름한 얼굴에 볼록한 이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쌍겹진 눈맵시가 약간 처져 있어서 귀엽고도 날씬한 판다 아가씨 같았다.
─그럼, 한국이랑 말이 같나요?
이쯤 되면 어느 중국 사람이나 꼭 한번 궁금해하는 물음이었다.
─글쎄 , 대만하고 대륙의 언어 같다고 할까. 기본은 같은데, 문법적으로 차이가 있죠.
나는 내가 어떤 식으로 설명해도 닝이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울안까지 차를 같이 타고 가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그것 말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얘깃거리들이 많고도 많았다.
나는 닝이 늘 내 얘기를 재밌게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닝은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다가도 학교 근처에 다다를 때면 다시 도서관의 얼굴로 돌아가서 헉─ 한숨을 쉬었다. 닝은 본인이 가장 흠모하는 사람이 ‘짱구 엄마’라고 했다.
─얼마나 좋아요? 언제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을 해가지고 애들과 전쟁이나 치르며 사는 엽기적인 엄마라뇨?
의료보험에 연금까지 보장된 평생직장을 두고, 무슨 엽기적인 엄마 노릇을? 그것은 닝의 배부른 투정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 거라고 나는 이해했다.
2년 전, 닝과 나는 그렇게 서로를 알게 되었다.
하얀 도료를 포대째 뿌려놓은 듯한 폭설이 내린 날, 세상은 나한테 하얗게 비어 있는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했던가. 무엇이든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맘때의 나한테 문뜩 찾아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느 옛 친구의 청첩장처럼.
─얘, 넌 모르지? 가끔 나는, 네가 되고 싶다는 거.
작은 마라탕(얼얼할 정도로 매운 쓰촨 성 유명 탕 요리)집 창가 쪽의 탁자 앞에 마주 앉아서 나는 닝을 건너다보았다. 남편 이름과 내 이름이 공동 서명된 아파트의 서류는 어제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왜?
벌써 군침이 도는지 닝은 주방 쪽을 향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뽀얀 수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라 우리 곁의 유리창은 한번 낙서라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촉촉하니 부예졌다. 서류는 원본과 사본까지 합하여 수십 페이지나 되었다. 남편이 싸인하는 동안 나는 그 서류들을 한 장씩 넘기면서 빨간 인주를 식지에 묻혀 손도장을 쉴새 없이 눌렀고, 내가 싸인하는 동안에는 남편이 그렇게 손도장을 찍었다. 우리들의 이름 위에 찍혀 있는 지문 자국은 오랫동안 집을 기다려온 우리들의 심장처럼 붉었다.
─넌, 니 집이 있잖아.
아줌마가 쟁반에 우리의 마라탕을 내왔다. 사천 촉국蜀國의 독특하고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가 나와 닝 사이에서 만연히 부유했다.
닝은 나무젓가락을 들고 딱! 소리 나게 갈라뜨리고는 자기 국그릇 붉은 국물 속에 잠복해 있는 당면 사리와 야채들을 노려보았다.
─너도 이제 생겼잖아, 니 집.
나는 나의 붉은 국물을 들여다보았다. 닝의 것 같은 투명한 당면 대신 나는 언제나 쫄깃한 밀냉면 사리를 주문하곤 했다.
─내 집이랑 니 집이 같니? 니 건, 완─전 니 거잖어.
헉! 한젓가락 당면을 입에 넣다 말고 닝이 급히 광천수 뚜껑을 틀어 열었다. 꿀꺽꿀꺽 물을 몇모금 마시고도 혓바닥이 뜨거운지 스읍스읍 연신 찬 공기를 들이켰다. 겨우 ‘보통마라’ 정도를 가지고 저런 호들갑을 떨다니…… 나는 닝이 보라는 듯, 나의 ‘다마다라’식 마라탕 그릇에서 한젓가락 면발을 크게 감아 입안에 스윽 집어넣었다. 입천장까지 마비시킬 듯 얼얼해지는 산초의 맛과 혓바닥을 찌르는 듯한 매운 고추의 맛이 한데 어우러져서 내 모든 미각세포들을 바짝 흥분시켰다.
─독한 것, 넌 맵지도 않냐? 참 조선족스럽다……
콧등에 벌써 잔잔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난 닝은, 나처럼 산초 맛과 고추 맛을 엄밀히 구분하지 못했다. 닝한테 있어서 그것들은 언제나 대충 모두 ‘매운맛’이었다.
─그래서 난 네가 부럽단 말이야.
마지막 한젓가락의 면발을 건져 먹으면서 나는 아직 건더기가 반쯤 남아 있는 닝의 그릇을 넘겨다보았다.
─뭔 말이야? 누구 집이면 누구 거지, 완전 아닌 것도 있니?
우리가 거리로 나왔을 때 세상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건물들과 길과 차들의 경계선이 옅은 어두움에 지워져서 가물가물 뭉그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너 혹시, 대출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전철 입구까지 걸어오다가 닝이 나를 돌아보았다. 닝네 아파트는 결혼할 때 시부모님이 사준 것이라고 언젠가 닝이 말한 적 있었다.
언제든 다 갚는 수가 있겠지…… 하면서 닝이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닝은 내 기분을 알 리 없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또 무언가를 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인테리어는 겨울이 지나야 할 수 있겠네.
가고 오는 전철들이 갈리는 곳에 서서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그만 헤어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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