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대한민국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다
여기 저울이 있다. 저울은 무게를 재고 값을 정한다. 저울은 판단과 측정의 기준이고 객관성과 보편성의 잣대가 된다. 저울은 수평을 유지했을 때 제 기능과 역할을 완수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의 저울은 기울어져 있고 추는 저울을 쥐고 있는 사람 마음대로 정한다. 그런 저울은 현재를 망칠 뿐 아니라 미래까지 깡그리 망쳐버린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의 삶은 보다 나을 것이라는, 나아야 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산다. 저울의 수평성은 미래사회가 지향해야 할 수평사회의 기준과 밑돌이 된다. 수평사회는 밝은 미래를 열어줄 결정적 열쇠다. 지금 우리는 고장난 저울을 버리고 새로운 저울을 마련해야 한다. 올바른 저울이 필요하다.
세상 돌아가는 게 궁금해서 TV를 켜본다. 하지만 우울하고 화나는 내용들뿐이라서 이내 채널을 돌린다. 괜찮은 교양 프로그램이라도 볼까 싶어 여기저기 돌려보지만 그 시간대에는 별로 없다. 최근 프로그램 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게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이나 ‘쿡방(요리하는 방송)’이다. 온통 먹는 프로그램들이다. 채널을 돌리면 어디선가는 ‘반드시’ 그런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왜 온통 먹방, 쿡방일까?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방송들이 우후죽순 방송되고 대세를 이루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 사는 게 좋아져서, 삶의 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다 맛있는 거, 건강에 좋은 것을 먹는 데 관심이 커져서 그렇다면야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의 삶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사람은 욕망을 갖고 있다. 본능적 욕망뿐 아니라 의지적 욕망을 갖고 있다. 그중 의지적 욕망은 인간의 특권이고 특징이다. 그 욕망은 대개 권력, 재력, 명예 등에 관한 것들이다. 그것을 획득하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는 것이기에 가치도 만족도도 높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욕망을 달성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망, 분노, 체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과거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졸업하면 신분이 바뀔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른바 ‘80:20’의 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신분의 상승과 순환은 거의 구조적으로 막혀 있고 부자가 될 가능성은커녕 부의 재분배조차 왜곡된 상태에서 가난을 대물림하기 십상이다. 부채는 나날이 늘고 희망은 점차 줄어간다. 인정하기 싫지만 ‘99:1’의 사회로 바뀌었다, 이미. 희망보다 절망이, 도전 대신 좌절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고 200통의 이력서를 내보지만 번듯한 직장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희망을 포기하면 남는 것은 분노와 절망을 넘어 체념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건 본능적 욕망뿐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성욕과 식욕만 남는 셈이다. 사랑조차 사치인 시대가 되었다. 어느 누가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마저도 각자가 생각하는 조건이 맞아야 꿈이라도 꾼다. 기성세대들은 지금 청년들을 공감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전 지금보다 못살 때였지만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다가가고 상대 부모를 찾아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뭘 믿고?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고 부모도 가난했지만 직장을 구해서 내 힘으로 살아나갈 자신감이 있었다. 가정을 꾸려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춘들에게는 그런 세상이 없다.
청춘이 사랑을 포기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고, 사실 미래를 포기한 극단적인 내몰림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힘들다. ‘그래도 니들은 젊으니까’ 하면서 보이지 않는 희망을 내민다. 하지만 이제 그 고통과 절망의 한계가 선을 넘었다.
사랑의 본능조차 ‘포기해야 하는’ 삶, 거기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죽으라고 ‘공부만’ 해서 얻은 대학 졸업장이 있어도 취업은 요원하고, 말도 안 되는 시급 알바로 번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 세 끼 식사는 해야 한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일 끝내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피한다. 돈 드는 일이라서. 그렇게 인간관계마저 포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청춘들이) 습관처럼 TV를 튼다. 그게 유일한 휴식이고 놀이다. 그런데 어딜 틀어도 먹는 프로그램들이 난무한다.
남은 유일한 욕망인 식욕을 자극한다. 먹는 것조차 연명을 위해 쑤셔넣는 수준의 식사를 반복하는 삶이 스스로 가련하다. 그런데 먹는 방송을 보니 그거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먹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왕 맛있는 거라도 먹고 살자 싶다. 직접 만들지 못하면 배달해서 먹으면 된다. 그것으로 나의 남은 유일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고, 그렇게나마 겨우 나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하물며 어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전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런 심리 기저들이 먹방과 쿡방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시장 환경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청춘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우리 어른들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는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 희망은 있는가?
OECD 가입국 가운데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 2012년 기준 10만 명 당 무려 29.1명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1위다. 더 두려운 것은 청년자살률이다. 지금도 하루 명의 청년이 자살한다. 청년자살률 또한 OECD 가입국 중 1위다. 그런데 40대 자살률 또한 만만치 않게 높다. 노인자살률과 노인빈곤률도 OECD 가입국 중 1위다.
비정규직 문제는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정부의 발표에 따라도 600만 명을 넘었고 노동계 발표에 따르면 82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도 많다. 그러나 다른 문제를 미뤄두고라도 과연 지금 대한민국은 이 문제를 해소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가? 모두 다 아는 우울한 이야기임에도 다시금 강조하는 이유는 이대로 방관하면 더 큰 절망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그 부모 세대의 일방적인 희생 덕에 지금 이만큼 누리고 산다. 낙관적 역사의 발전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식 세대들이 나보다 덜 누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바닥에 처박혀 있다. 부당한 해고에 대해 절규하는 노동자들을 보고 젊은이들은 “나도 해고 좀 당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노동시간이 너무 길다며 야근을 줄여달라는 요구에 대해 젊은이들은 “나도 야근이라는 걸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그냥 흘려들어선 안 된다. 정치인들의 가장 큰 죄악은 바로 이 점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이고, 정치 지도자의 가장 큰 패악은 이들을 위한 미래 의제를 제시하고 비전을 보여주며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은 외면하면서 자신의 입지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저들을 뽑았는가? 바로 우리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정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숨 쉬는 것조차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어찌 하여 지금의 힘든 삶이 정치 때문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짚어보며 더 나은 미래로의 명확한 의제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이고,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수냐 진보냐, 좌파냐 우파냐 따위의 논쟁은 차치하자(실제로 우리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좌파가 있기는 한지도 의문스럽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면 곧바로 진영논리에 빠뜨리고 신 매카시즘의 굴레로 묶는다. 진영논리의 배후에는 그런 이분법적 논리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에게 미래 따위는 관심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지금의 권력을 누리는 것뿐이다. 이 책에서 정치 문제를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정치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뿐, 정권과 권력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 이것은 ‘정치는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정치 담론이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당면한 미래 의제를 세 가지로 뽑았다. 경제・교육・세대가 바로 그것으로, 내가 이 세 가지 의제를 뽑은 것은 미래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올바른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위해서다. 망가진 저울을 여기부터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미래 의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주주의적 수평성을 이루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주의는 이념 논쟁에서 비롯된 정치적 이슈로만 주로 다뤄져 왔고, 다루어졌다 하더라도 ‘경제 민주주의’와 같이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 속에 잠들어 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미 구시대의 논쟁거리가 돼버린 정치 민주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왜 민주주의적 수평성과 자유가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가 맞이할 현실적 미래에 얼마나 꼭 필요한 것인가를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경제’에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수직 명령체계로 인한 성장동력의 상실에 대해 다룰 것이다. ‘교육’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소수를 위한 교육현실과 그것이 낳을 미래의 또 다른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마지막 ‘세대’ 부분에서는, 수평사회를 온전히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초의 수평사회의 기초적 교육을 받고 실제로 그런 사회를 위해 싸웠던 새로운 실버 ‘세시봉’ 세대가 굳은 사고가 아닌 미래지향적 사고로 유연해져야 젊은 세대를 위한 진지한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노년층의 투표 성향이 바뀌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바뀐다.
나는 이 책에서 단순히 선언이나 관념적 분석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심각하지 않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이 만능 열쇠는 분명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늘 외치기만 하고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부터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이 ‘고장난 저울’을 고치고 수평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더 나은 아이디어와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작은 밑돌이 되기를 희망한다.
더 이상 청춘들이 먹는 방송을 보면서 겨우 기본적 욕망을 ‘대체 실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일본에서 초식남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을 때 먹는 방송이 많이 나왔다는 사실을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 초식남은 결국 ‘섹스리스’의 청년들을 상징한다. 동물적 욕구 이상의, 의지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올바른 판단과 실천에 달려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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