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적어도 『사기』의 경우에는 그렇다.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 『사기』는 승자의 기록이기는커녕 오히려 실패한 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 가깝다. 가령 사마천의 비극이 아니었던들 『사기』는 흔한 역사서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기록물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옹호했던 한漢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은 패장이었을 뿐 아니라 황제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에 항복한 국가의 배신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패자의 용기는 드러나기 어렵고, 믿음을 저버린 행위는 비난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런 패자이자 배신자인 이릉의 용기를 세상에 드러내 한나라가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천하에 알리려고 했다. 그래서인가. 사기의 기술은 여타의 역사서들과는 서술의 순서부터 판이하다.
『사기』 전체 분량의 절반을 넘는 〈열전〉에서는 굶어 죽은 자가 맨 앞에 나서고 돈을 벌어 치부致富한 자가 맨 뒤에 물러나 있다. 진왕을 죽이려다 실패한 칼잡이 형가에 대한 평가는 결코 승자였던 황제 유방의 아래에 있지 않으며, 옥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비가 당대의 영웅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러니 『사기』를 두고 말하자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마천 스스로가 생식기를 잘리는 치욕적인 부형腐刑을 받고 구차한 삶을 살았던 시대의 패배자였다. 그런 점에서 『사기』는 승리를 구가하는 기록이 아니라 패자가 감내했던 치욕과 발분의 소산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형틀에 묶인 채 회초리를 맞거나 몸뚱이가 훼손되고 팔다리가 잘리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다. 그러나 생식기를 잘리는 부형을 당하는 일이야말로 치욕의 극이다. 내가 이런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살면서 더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아직 다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한스럽고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문장의 찬란함으로 후세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100세대가 지나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에 내장이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고통을 맛보고, 늘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그가 치욕을 감수하면서 끝내 남기고자 한 말이 『사기』로 남았고 여기에 담긴 문장은 찬란하기 비길 데 없다.
역사를 뜻하는 ‘사史’는 본디 ‘중中’ 자와 ‘우メ’ 자가 합쳐진 글자로 화살을 쏘아 몇 번 맞혔는지를 기록한 점수판〔中〕을 사람이 손〔メ〕으로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글자다. 화살을 쏘는 것이 과거를 살았던 어떤 사람의 행위를 뜻한다면 점수판은 그에 대한 기록, 곧 평가를 의미한다. 그러니 역사는 한낱 과거의 기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평가하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 서백은 갇혀있으면서도 『주역』을 풀이했고〔演〕, 공자는 곤경에 빠졌으면서도 『춘추』를 지었으며〔作〕, 굴원은 쫓겨났으면서도 〈이소〉를 노래했고〔著〕, 좌구명은 눈이 멀었지만 『국어』를 남겼다〔有〕. 손빈은 발이 잘렸으면서도 병법을 논했고〔論〕,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났으면서도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傳〕 한비는 진나라에 갇혔지만 「세난」과 「고분」을 저술했다. 이들은 모두 마음에 맺힌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기록하여 미래를 기약한 것이다.
오직 현재의 권력에 모든 것을 바치는 자가 다수인 이 시대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약하는 자 누구인가. (2013. 9. 2. 《경희대학교 대학주보》)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