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회주의 운동,
그 ‘선구’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국 사회는 일제와 맞서 싸운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통상 ‘독립운동가’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들에 대한 서훈 또한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지요. 2021년 그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된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만 해도,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 이력까지 있지만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몇 차례 언급될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 이동휘李東輝, 1873~1935에게도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사회주의 운동의 주역 상당수는 이미 한국에서 ‘독립운동 공로’로 사후에 훈장을 수여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독립운동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색깔’ 때문에 이들을 외면하고 싶어도 도무지 그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의 공적서에는 대부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하여”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야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서훈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그저 ‘방편’이었을까요? 물론 이들은 일차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열망했습니다. 이들의 강령들에는 조선의 독립, 민주적 민족국가 수립이 ‘1차 혁명’으로 반드시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목표가 그것뿐이었다면, 이들로서는 굳이 공산주의를 택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우파 민족주의 운동 등 다른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새로운 민족국가 건국을 희구할 뿐만 아니라 친민중적 방향으로 건국의 청사진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최성우崔聖禹, 1898~1937는 언젠가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새 강령을 4년 동안 작업해서 1934년에 공식 발표합니다. 이때 새로운 나라의 모습은 ‘진보적 복지국가’로 그려지지요. 사회주의자들은 ‘건국’을 구상하면서 8시간 노동제부터 학교의 민주화, 암기 위주의 ‘노예 교육’ 철폐까지 거론합니다. 즉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단순한 ‘방편’이라기보다 언젠가 독립할 조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은 혁명을 거친 새 나라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착취와 불평등 없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원했습니다. 독립과 건국에 대한 이러한 발상은 전간기戰間期,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1918~1939년 사이의 아주 특별한 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20여 년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전쟁은 열강들의 새로운 서열이 정해지는 ‘장’이었는데, 열강 지배자들이 예견하거나 제어하지 못한 파급 효과를 낳았습니다. 거의 전 세계가 혁명과 반란, 각종 독립운동의 화염에 휩싸였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 1919년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독립운동에다가 1916년 아일랜드 봉기무장 독립운동, 1918년 헝가리혁명과 일본의 쌀 소동과 스위스의 총파업, 1921년 몽골혁명 등이 이때 벌어졌습니다.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에서는 1916~1923년 사이에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던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1923년 이후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다소 안정되지만,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을 기점으로 다시 전례없는 혼란에 빠져들었고요.
이 책에서 언급할 박치우朴致祐, 1909~1949와 신남철申南徹, 1907~1958의 저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중도 자유주의의 유효 기간이 끝나고 급진 혁명과 극단적 반동인 파시즘이 대립하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았습니다. 공산 혁명이냐, 파시즘이냐의 양자택일 상황에 처했다고 인식한 조선 활동가들은 자연스럽게 전자를 택했지요. 위기의 시대는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태생적 문제인 불평등, 빈곤, 제국주의적 침략, 차별 등을 단번에 해결해보고자 하는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급진적 고민,
그 선구적 노력
대개 당대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의미를 읽기 어렵습니다. 그 의미는 보통 사후적으로 다음 시기에 정확히 해석되지요.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세계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였던 전간기는 ‘종말’이 아니라 ‘주기적 공황’이자 ‘패권 교체기’였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활용한 미국이 패권을 잡게 되지요. 이후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일제는 패망하며, 일본은 군사보호령으로 편입되어 미 제국의 속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성우나 양명梁明, 1902~? 같은 사회주의적 분석가들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토착 엘리트들을 ‘매판자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 엘리트들은 해방 이후에 또 하나의 미 제국 군사보호령인 한국의 지배자가 되어 공산주의를 박멸하려는 반공 규율 국가의 기틀을 잡습니다. 또 다른 비극으로 조선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의 조국’이라고 여겼던 소련의 보수화를 들 수 있습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 1879~1953과 그 관료들의 독점적 지배 아래에서 결국 국가 주도 개발에 치중하는 국민국가로 재편되고 맙니다.
이 범세계적인 구도 재편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경우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몇몇은 자연사했지만, 대부분은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치우처럼 빨치산으로 한국 군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김명식金明植, 1890~1943처럼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요절한 이들도 있고, 최성우, 양명, 남만춘南萬春, 1892~1938, 김만겸金萬謙, 1886~1938처럼 스탈린주의적 소련 관료들에게 희생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매우 비극적이게도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임화1908~1953는 본인이 그 건국에 참여한,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관료화되어 혁명성을 잃어버린 북한에서 탄압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미래’를 보고 살았지만, 정작 본인들의 미래는 대부분 고통과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었을까요? 비록 이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았지만, 이들이 선구적으로 내놓은 사상, 발상, 개념의 깊이와 넓이에 우리는 이제야 가까스로 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위건韓偉健, 1896~1937은 국제주의적 연대를 바람직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시민들이 군사 정변으로 인권을 짓밟힌 미얀마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운동가 사회의 비민주성, 각종 작은 ‘수령’들의 군림, 대중과의 괴리 등에 대한 한위건의 비판은 오늘날 급진적인 활동가들이 읽더라도 그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신남철, 박치우, 임화 등은 당대 주류의 ‘국학國學’ 운동을 비판하면서 조선을 보편이 아닌 특수로 취급해 오로지 그 ‘우수성’을 입증하는 데 매진하는 극렬 민족주의적 접근법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오늘날의 속칭 ‘국뽕’, 각종 ‘재야사학’ 등 유사 사학의 낭설들을 보더라도 이들의 혜안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지요. 김명식은 민족을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상상의 공동체’로 민족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보편적 접근을 거의 그대로 예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식민지 시절의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선구자’였습니다. 가령 이 책의 주인공 중 하나인 허정숙許貞淑, 1908~1991이 꿈꾸었던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여성 고용률이 57.8퍼센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1위인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얼마나 실현되고 있을까요? 허정숙을 비롯한 당시의 급진파 신여성들은 으레 단발을 하곤 했는데요.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안산 선수의 단발이 ‘문제’가 된 것을 보면, 이들의 행동 양식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일부는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급진적이었던 게 아닐까요? 순차적으로 몇 명의 남성 파트너를 두었던 허정숙의 사생활은 1920~30년대에도 가십성 기사의 단골 메뉴였지만, 그녀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살았더라도 일각에서 지탄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허정숙의 사례를 통해 극명히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자들은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달렸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여러모로 매우 ‘멀리’ 나간 만큼 이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거나, 허정숙의 말년처럼 새로운 관료/가부장 체제와 타협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구적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평등이나 복지 같은 개념이 한국의 토양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었겠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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