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과거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국가 관료들이 백성 사이에서 불리는 노래를 채집하러 다녔다. 민요를 곧 민심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민심을 읽으려 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젊은층의 민심을 읽기 위해 젊은이들이 지어낸 신조어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런 신조어가 사회의 특징을 예리하게 짚어내 한번 매체에 소개되면 전국민적 용어가 되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 중·고등학생들의 은어였던 ‘왕따’라는 말이 한국형 조직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잘 표현해 이제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된 것이 좋은 예다. 이런 용어들을 잘 보면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그대로 보인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를 보고 느껴지는 게 있는가?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 5포세대(‘3포’에 취업, 주택 구입 포기를 추가), 7포세대(‘5포’에 인간관계, 희망 포기를 추가),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청소년·청년),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된 이태백(‘20대 태반은 백수’의 준말)이나 인구론(‘인문계 졸업자는 90%가 논다’의 준말) 등. 이와 같은 신조어의 뜻을 외국 대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실상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대학교원 입장인 나만 해도, 벌써 절망과 무기력의 무드에 빠질 정도다.
절망 코드야말로 한국 젊은층의 신조어를 관통한다. 이들 신조어 중에서도 압권은 헬조선, 즉 ‘지옥 같은 한국’이다. 영어인 ‘헬’(Hell=지옥)은 이 신조어의 현대성을 부각하지만, ‘한국’도 아닌 ‘조선’이 등장하면서 이미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 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한다. 150년 전에 조선의 한양 북촌에서 태어난 권문세가의 자녀들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듯, 오늘날 ‘강남족’은 거의 자기들만의 세습적 카스트를 이루어 거주지, 통혼권, 학습·유학 루트, 언어(영어 상용 선호), ‘웰빙’ 등의 차원에서 배타적인 세습신분계층을 형성한 게 아닌가?
‘헬조선론’이 한국의 2010년대 중반을 대변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한 세기 이전에 레닌이 제정러시아를 가리켜 “제국주의 세계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약한 고리’라는 것은, 제정러시아는 비록 ‘열강’ 대열에 속하긴 했지만 ‘열강’치고 민중의 박탈감이 가장 강하고 온갖 모순들이 가장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회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열강’의 위치에 있다 해도 실은 가장 내파되기 쉬운 나라라는 점을, 레닌이 간파한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외형상 (명목상의 국내총생산액으로 치면)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며 세계 5위 수출대국, 세계 7위 군사력 보유국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준)열강이다. 한데 서민 대중의 실질적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부자 나라 클럽이라고 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긴 했지만, 문맹률이 70%이던 제정러시아가 문맹자가 극소수이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랐듯이, 한국의 사회적 지표들도 여타의 OECD 국가들과 완전히 다르다. 예컨대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예산 비율은 10.4%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2014년 기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그래도 2년에 1%씩 오르긴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프랑스(31.9%)나 핀란드(31%)와 비교하는 거야 무리라고 해도, 경제력이 한국보다 훨씬 약한 에스토니아(16.3%)와도 격차가 꽤 크다. 대한민국을 ‘복지 없는 경제대국’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내총생산 대비 세금 부담률(24%)도 프랑스나 핀란드보다 두 배 정도 낮긴 하다. 하지만 저과세는 세금 낼 소득원 자체가 없는 가난한 젊은이들보다는 현대판 경화벌족京華閥族인 ‘강남특별시’ 시민들에게 훨씬 유리한 것이다. 저과세와 무복지는 결국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과 최저에 가까운 출산율로 이어지고, OECD 회원국 중 최저의 주관적 행복지수로 이어진다. 행복지수가 꼭 주관적 ‘감성’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신체적 체감까지 포함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7시간 49분)은 프랑스인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짧아 OECD 국가에서 최저인데, 잠도 충분히 잘 수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지옥에서 산다”고 하는 게 근거 없다 하기 힘들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막대한 군사력과 그 민중의 처참한 삶이 전혀 다른 차원에 속했듯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휘황찬란함은 그 생산의 피라미드를 뒷받침해주는 다수의 불안정노동자와 자영업자, 빈민의 삶까지 윤기 나게 하지는 않는다. 보통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성인 당사자들만이 서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계급 재생산이 학벌 피라미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한국의 경우에는 부모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까지도 이미 유치원 때부터 ‘대입’을 염두에 둔 피 말리는 교육자본 축적 경쟁에 투신해야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동기를 빼앗기고, 어른은 어른대로 교육비를 벌기 위해 삶을 저당 잡힌다. 초·중·고 학생 1인당 월평균 24만 원의 사교육비, 즉 일종의 사설 교육세금을 내기 위해 빚을 지거나, 병날 각오를 하고 두 직장을 다니기도 한다. 한국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국가인 일본의 월 사교육비(평균 15만 원 정도)보다 훨씬 높다. 승자가 태생적으로 이미 거의 정해져 있으며, ‘패자 계층’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사람이 경쟁하면 경쟁할수록 질병과 채무만이 늘어나는 곳은 정말로 지옥 아닌가?
제정러시아와 오늘날 대한민국의 유사성은 ‘국력’과 ‘민중 행복지수’의 믿지 못할 정도의 불균형으로 끝나고 만다. 제정러시아는 이미 1905년 혁명 이후로는 전 세계 혁명 전위의 위치에 올랐지만,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더 짙은 보수성을 드러낸다.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민을 토론하거나 이런 데서 태어난 ‘팔자’를 한탄하지,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핵심어로 떠오른 ‘이민’은, 결국 더 부유하고 재분배 제도가 그나마 돌아가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시장 경쟁(단 한국보다 덜 치열하고 더 공평한 경쟁!)에서 삶의 터를 잡으려는, 사실 극히 보수적인 꿈을 함의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대공장 고숙련 남성 정규직들은 볼셰비키(레닌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혁명의 주도세력)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공장의 조직화된 숙련공들이 자본주의를 문제 삼기는커녕 비정규직들과의 연대마저도 사양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헬조선’에서 죽창의 그림자마저 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은 없다.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한국 젊은이들을 투쟁이 아닌 절망으로 몰고 갔다. 예컨대 한국에서 자주 ‘좌파’로 오인되는 주류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실망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2002년과 201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20·30대의 지지는 각각 59%와 64%였는데, 과연 ‘주류’ 야당이 젊은층 지지를 받는 만큼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일이 많은가? ‘88만원 세대’, 즉 불안정노동시장으로 내몰린 대규모 젊은층의 출현은 사실 노무현 집권 때부터의 현상 아닌가?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 안정을 이룩한 부모 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한편으론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탓’으로 쉽게 돌린다. 성장이 둔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하는 경험을 앞으로 몇 년은 더 해야, ‘헬조선’의 피해자들이 이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살 길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인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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