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어언 50년이 지났다. 시인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도보다리’를 생각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중립을 꿈꾸었던 시인은 일찍이 저 ‘도보다리’가 있는 곳을,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평화로운 논밭”, 즉 ‘중립지대’라고 이름 붙인 바 있었다.「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1968년 … 시인의 그 꿈처럼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의 소망도 진정 영글어 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제 우리는 시전집에 이어 6년 만에 산문전집을 엮어 내놓는다. 우리는 이 산문전집 역시 그 자리를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우리 겨레의 ‘도보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누구보다도 온몸으로 우리의 역사를 살고 여전히 ‘살아 있는 신동엽’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우리는 감히 생각한다. (엮은이 ‘서문’에서)
제7부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
1
내 마음 끝까지
M ―
아직도 안 주무시고 이 시간을 기다려주셔서 고마워요. 창밖에선 바람이 불고 있군요.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세요.
M ―
오늘 하루, 얼마나 고단하셨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모든 잡념들을 말끔히 씻어 저 망각의 강 언덕 너머 흘려보내시고, 음악 위에 수놓은 시 따라 명상 따라 우리들만의 세계로 거닐어보실까요? 우리 마음 끝까지 우리 마음 끝까지.
M ―
인도의 시인 ‘타고르’라고 기억하세요? 왜 있지 않아요? 1913년 동양에선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 시인 말예요. 그 타고르가 첫사랑을 노래한 시가 있어요. 제목은 「내가 혼자」.
읽을 테니 들어보세요.
“내가 혼자
약속한 장소로, 만나러 가는 밤은
새는 노래하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거리의 집들은
말없이 입 다물고
서 있습니다.
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은 소리를 냅니다.
나는 부끄럽습니다.
나의 노래에 앉아 그이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나무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물은, 잠에 빠진 보초의
무릎 위의 총검과도 같이
여울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사납게 뛰는 것은
내 심장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되겠습니까.”
M ― 〈잠깐〉
“사랑하는 이가 오셔서
내 곁에 가만히 앉습니다.
내 몸이 가볍게 떨립니다.
그리곤 내 눈이 감깁니다.
밖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바람이 촛불을 불어 꺼버립니다.
그리곤 구름이 별을 가리며
면사포를 잡아당깁니다.
내 가슴속 보석이
반짝이며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그 보석의 빛남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M ―
첫 데이트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열아홉 처녀의 심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 않아요?
“내가 혼자 약속한 장소로
만나러 가는 밤은, 새는 노래하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거리의 집들은 말없이 입 다물고 서 있습니다.
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은 소리를 냅니다.”
자기가 자기의 발자국 소리를 한발자국…… 두발자국…… 들으며 걸어본 기억이 계신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그 귀한 순간뿐이니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 밀려가고 밀려오는 인파와 인파…… 오늘 하루의 수지 계산…… 그 사람과의 거래, 밀담, 이런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들을 잃어가고 있어요. 자기 자신들을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 빼앗겨가고 있어요.
수단은 버려지고 목적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모든 목적지에 도달해보면, 또, 다시 허전해짐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가는 도중이 중요한 거예요.
좋아하는 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뵈러 가면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자기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샘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
이건 오랜 옛날부터 우리 동양 사람들이 아름답게 간직해온 자랑스러운 천성이에요. 서양 사람들이 독약이나 칼로 애인을 빼앗으려 할 때, 우리 동양 사람들은 하늘의 별과 자기 마음속의 아름다운 진주보석을 노래하면서, 가랑잎 비집고 한발자국 두발자국 다가오는 사랑하는 이의 발자국 소리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루 한번만이라도 좋아요. 그대 자신의 심장소리, 당신 자신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봐주세요.
M ―
밤이면 가슴속 보석이 빛나기 시작한다고 타고르는 노래했어요. 어느덧 자정인가보군요. 당신 가슴속에 영롱한 별을 심어드리고 싶어요.
그럼 안녕, 안녕.
M ―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