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
종교는 성차별적 제도인가
남성중심 문화에서 여성들은 종교에 무엇을 기대하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종교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남성중심적인 전통과 교리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 한편 종교는 가부장제에서 고통 받는 여성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폭력과 불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제도적, 문화적 차원에서 성차별에 저항하게 하고 변화를 주도하기도 한다.
종교 안의 여성 차별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의 여성들은 자신이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명예살인, 투석형, 히잡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명예살인이란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거나 성적으로 난잡하다고 간주되는 여성을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성 친척이나 오빠, 아버지가 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관습법에 기초하므로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거나 가벼운 형량을 받고 풀려난다.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간통을 저지르면 남녀를 막론하고 투석형에 처한다. 간통죄는 여성에게 보다 불리하게 적용되어 여성이 투석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몇몇 무슬림 국가에서는 여성이 외출할 때 히잡을 쓰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그 처벌 중에는 태형도 포함된다. 무슬림 여성은 차를 운전할 수 없으며, 남성 동행 없이 외출할 수 없다.
한국 여성은 몇몇 무슬림 국가의 여성보다 성평등한 사회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 여성이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한국 여성들은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여성의 몸은 출산의 도구로 여겨졌고, 남아의 출산이 여성의 운명을 좌우했다. 유교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군자君子와 성인聖人을 지향하지만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글을 읽거나 인격을 도야할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로서 가사와 양육, 시부모 돌봄에 전념하며 평생 살아야 했다.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집’이라는 통념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아, 남아 선호와 남성의 가장권, 고용에서의 성차별 등으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불교는 여성이 부처가 되기 전 남성의 몸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교리를 수용했던 적이 있다. 또한 여성은 부처가 되기 위해 남성보다 많은 계율을 지켜야 했다. 여성은 설법을 할 수 없고, 여승은 남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전통에 복종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여성의 고통과 저항으로 변화해온 것이다.
태국은 남부의 무슬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민이 상좌부불교를 믿는다. 승려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고 승려들은 국민에게 최고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남성만이 승려가 될 수 있다. 여성은 영적 수련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서, 승려의 몸을 만지거나 승려에게 물건을 건넬 수 없다. 태국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절에서 교육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규율 때문에 여아들의 교육 기회가 제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여성은 평등한 위치에 있었는가. 빙겐의 힐데가르트 수녀Hildegard von Bingen,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Teresa de Cepeda y Ahumada, 멕시코의 후아나 수녀Juana Inés de la Cruz 등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 신부들에게 영적 지도를 받아야 했고, 이들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았다. 영적 지도자인 남성 신부들은 때때로 재능 있고 영적인 수녀들을 질투하고 그들의 영적 진보를 방해했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면서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새로운 역사를 쓴 여성 영성가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남성의 승인을 받기 위한 투쟁에 생의 대부분을 소비하다가 지쳐서 세상을 떠났다.
몇몇 여성 신학자들은 유교의 교리가 남녀의 위계적인 위치를 전제하고 음양의 조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의 요소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들은 여성해방의 전통을 성서,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유교 문화권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역사 어디에서도 성평등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어떤 종교가 더 여성친화적이고 어떤 종교가 더 남성중심적인가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종교는 인간 세계와 분리되어 산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중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종교가 얼마나 더 성차별적인가를 논하기보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야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에 여성은 없었다
예수님이 만났던 여성과 21세기의 교회 안의 여성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시의 여성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중에서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을 따르는 여성들을 사랑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여성은 없었다.
가톨릭의 주요 행사인 성탄 전야와 부활 전야에서 촛불을 앞세워 입장하는 남성 사제와 신학생의 모습은 남성중심적인 교회를 실감하게 한다. 가톨릭 신학교는 수도자나 평신도의 입학을 허용하지만, 21세기에도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고 여아들의 역할모델은 제한되어 있다.
여성 신자는 미사 시간에 미사포를 써야 한다. 이 전통은 성서에 제시되어 있다. 남성의 머리는 하느님을 상징하지만, 여성의 머리는 남성의 머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남자든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자는 머리가 깎인 여자와 똑같습니다. (…) 남자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영광이기 때문에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1고린 11, 3-5. 7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여성은 여전히 미사포를 써야 한다. 어떤 여성들은 미사포를 미사에 집중하고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로 해석한다. 하지만 여성 신자가 미사포를 쓰지 않는 경우 ‘예의 없다’고 비난받는다. 엄격한 사제는 미사 중에 야단을 치기도 하고, 영성체를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남녀 직분의 분리는 성체 분배에서도 나타난다. 수도자인 수녀와 중장년의 남성 신자가 성체를 분배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여성 신자가 성체를 분배하는 상황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에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복사를 서고, 미사 전례에서 사회나 독서를 맡기도 한다. 성당을 청소하고 행사 음식을 마련하고 돌봄을 기초로 하는 자원활동에 참가하면서도, 단체장을 맡거나 예비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한다. 사제들도 사석에서는 여성 사제를 반대할 만한 논리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 신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학을 공부하는 데 제약을 받으며, 성직자가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제도 속에서 소녀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도 여성은 끊임없이 상처 받는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굳은 신앙만으로 교회에 머무를 순 없다. 교회 안에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열정적인 여성들은 결국 교회를 등지고 만다.
폭력을 신앙으로 극복하라고?
종교는 세상에서 상처 받은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집이 휴식처가 되지 못하는 여성, 집을 나와 갈 곳 없는 여성에게 교회, 성당, 절은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처를 보듬어줄 공간이 필요하다. 경제력이 충분하다면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거나 충분한 자원이 없는 여성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종교에 의지하곤 한다.
종교는 소외된 여성에게 열려 있으며, 구원의 손을 내민다. 여성들은 기도하면서 자신과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시간을 보낸 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종교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아편과 같다. 실컷 울고 난 여성들은 일시적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가족에게 돌아간다. 종교는 여성에게 성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여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지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종교는 여성에게 가정 내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권고하기보다는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피해자인 ‘착한’ 여성에게 침묵하고 희생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종교는 매 맞는 여성에게, 남편의 외도로 분노하는 여성에게 ‘내 탓’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남편이 변화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다리라고 가르친다. 매 맞는 여성들은 ‘내가 잘하면 언젠가는 남편이 변화할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고 남편의 폭력은 지속, 심화될 뿐이다. 남편이 변화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고통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여성의 삶은 소중하며 남편의 회개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폭력 남편을 감화시키면서 신앙으로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피해자 여성의 고통을 가중할 뿐이다. 왜 여성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이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종교는 궁지에 몰린 여성을 구조하기보다 방관했고 적극적으로 이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 종교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용기를 갖고 부정의한 현실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여성들이 내면의 힘을 키워 최선의 판단을 하도록 지지해야 한다. 인내만이 가족을 지키는 길이 아니다. 폭력적인 관계를 청산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생명 존중과 여성 인권의 이분법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성性은 생명 존중과 인격적인 관계에 기반한다. 교회는 혼인성사로 맺어진 이성애 부부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혼전 성관계, 동거, 이혼, 동성애 등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과 성은 연속선에 있지 않지만, 가톨릭교회는 결혼과 성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교리는 여성의 피임, 낙태, 출산 등의 문제에서 여성 인권과 충돌하기도 한다.
여름이 되면 신부님들은 미사에 올 때 짧은 치마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라고 당부한다. 분심이 들어 미사를 드릴 수 없다는 이유다. 그 분심의 주체는 남성이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하다. 특히 금욕은 남성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으로 당연시된다. 종교적 수련을 위해 성욕조차 이겨낸 남성이 자기만족으로 기뻐하는 이면에서 여성은 물적인 존재,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폄하된다.
또한 가톨릭 교리에서는 인공피임과 낙태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생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간 등으로 인한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해 출산을 권고하는 교리는 여성에게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안긴다. 여성은 ‘생명’이라는 절대 불변의 진리 앞에서 살인자가 되고 죄인이 되지만, 남성은 이 책임에서 자유롭다.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해도 출산을 해야 한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임신한 여성은 출산을 해야 한다”라는 교리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여성 신자는 극소수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여성이 낙태를 하는 이유는 생명 감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싱글맘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고 어머니로서 태어날 자녀에 대한 교육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출산 장려 정책 이전에도 미혼모 시설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미혼모’에 대한 낙인을 없애는 데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싱글맘들은 사회적 편견 속에서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고 살아간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된 영혼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낙태한 여성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은 여성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낙태가 인생의 오점이고 수치심이라는 해석에 머물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명을 소홀히 다뤘거나 성적 욕망에 따라 행동한 탓이라는 비난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교회는 여성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듯 보이지만, 낙태가 자신의 미래와 자녀의 양육 환경을 위해 내린 주체적인 선택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권리를 서로 대치하는 가치로 인식하는 이분법하의 단순화된 이해에서 비롯한다. 여성에게 낙태가 간단하고 쉬운 결정이라는 통념도 그러하다.
가톨릭교회는, 생명 존중이라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덕목 뒤에 가려진 여성의 고통을 간과한다. 여성이 피임, 임신, 출산 문제에서 얼마나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고 상대적으로 남성이 이 책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항상 반反여성적인 입장을 취해온 것은 아니다. 교회는 생명 존중에 기초해서 난자 매매나 인공수정에 반대한다. 이러한 입장은 의료 권력하에서 여성의 몸이 도구화, 상업화될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성매매 반대 운동을 통해 ― 성매매 여성에 대한 도덕적인 낙인이나 피해자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더라도 ― 여성의 인신매매, 성폭력, 성 상품화에 반대함으로써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운동은 가톨릭교회가 성평등에 대해 무엇을 논의하고, 여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교회는 성별 권력이 작동하는 가운데 주변화된 여성의 삶을 이해하고, 이들을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할 해결책을 고민하면서 여성친화적인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
성평등한 교회를 위하여
오늘날 “여성을 차별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종교는 없다. 그럼에도 종교의 경전과 전통은 여전히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종교의 성차별이 위험한 이유는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성 성직자가 나오지 않는 가톨릭교회에 여성 신자들이 머물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남성 성직자의 우수한 지도력 때문이 아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성들이 성차별을 경험하면서 언제까지 가톨릭교회 안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젊은 여성 신자들이 10년, 20년 후 이러한 문제로 교회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여성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여성 성직자가 없었는지 의아해하고 여성 성직자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기대한다. 설사 그들이 성직을 갈망했던 선배 여성 신자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세상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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