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연행되어 간 소녀들
보내 준 편지 잘 읽었어. 유미도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하고 있구나. 그나저나 비디오에 시로타 씨가 나왔다니 정말 놀랍다.
비디오를 보고 우리 또래 남자애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역시 유미다워. 난 거기까진 생각 못했거든. 유미 말을 듣고 하마다 선생님 성희롱 사건을 우리 여학생들 선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남자애들과도 함께 고민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알다시피 우리 또래 남학생들이 워낙 장난스럽잖니. 그래서 우리끼리만 의논했던 건데, 남학생들도 한 번 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번엔 여자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선뜻 나서지 못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남학생, 여학생 모두 함께 의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무런 고민 없이 어른이 되면 하마다 선생님처럼 성희롱을 하거나 여자를 돈으로 살 수도 있으니 말이야.
며칠 전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서 가와세 씨 댁에 놀러 갔어. 너무 반갑게 맞아 주시는 거야.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아. 과거를 제대로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한다고 말씀하셨지. “좀 길지만 아사코가 연구회에서 발표했던 리포트가 몇 부 남아 있으니 천천히 읽어보렴. 나머지 2부는 유미랑 새 친구 노리코에게 선물하렴” 하시며 동봉하는 리포트를 주셨어.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감명을 받으셔서 몇몇 분들과 그룹으로 한국을 방문하셔서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을 직접 찾아뵈었다고 해. 그때 찍은 사진도 보여 주셨어. 가와세 씨는 계속해서 이와 관련한 리포트를 써 가실 거라고 하셨어. 다음 리포트가 나오는 대로 유미에게도 보내 줄게. 나도 하마다 선생님 사건을 계기로 친해진 후미코와 미에와 함께 돌려가며 읽어보려고 해. 그럼 이만.
- 아키가
경찰서 앞에서 순사가 불러 세우더니
가와세 마키코의 르포 ①
시로타 스즈코 씨의 꿈에 등장하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죽어 간 소녀들은 도대체 어떻게 끌려가게 된 것일까? 우선 윤두리(1928~2009) 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분은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열다섯 살 때부터 부산에 있는 군복을 만드는 피복 공장에서 일했다. 거기서 일본인 과장에게 몇 번이나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초량에 있는 장갑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려고 길을 나섰다가 귀가하던 중, 부산진역 앞 남부경찰서를 지나고 있었는데, 일본인 순사가 불러 세우더니 아무런 말없이 그 길로 경찰서에 감금되었다.
경찰서 안에는 이미 소녀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모두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줄 테니 기다려”라는 순사의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군인이 오더니 트럭에 소녀들을 모두 태웠다. 1943년 9월 초순의 일이었다.
결국 열명의 소녀와 함께 경비선에 태워져 부산 영도 제1위안소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장교인 듯한 군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뒤로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군인들로 붐볐다. 그렇다고 군인을 상대한 대가로 돈이나 군표(전쟁 지역에서 필요에 의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특별한 화폐)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 함께 했던 45명의 ‘위안부’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그 가운데 두 여성이 임신을 했다. 한 명은 중절수술에 실패해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자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의 상황을 윤두리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생리가 있는 날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생리대 대신 지급받은 거즈를 붙이고 있을 틈도 없었어요. 아무튼 죽지 않는 이상 군인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죠.” “임질에 감염된 적도 있어요. 병원에 드나들며 주사를 맞아야 했고, 약을 한 움큼씩 먹었습니다. 위안소를 나온 후에도 몸이 안 좋을 때면 어김없이 재발했어요.” “군인이 오지 않는 경우는 집이 너무도 그리워 모두 함께 울었어요.”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군인과 업자들은 사라졌지만, 윤두리 씨는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식당에서 1년 간 일한 후에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윤두리 씨는 “다시 한 번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아마 죽어서 눈 감을 때까지 내가 당한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라고 호소했다.
문옥주(1924~1996) 씨의 경우,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병사하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져 어린 나이에 일선에 나갔다. 1940년 늦가을, 친구와 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복 차림의 일본인의 손에 끌려 헌병대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헌병대에는 같은 또래 소녀들이 몇몇 더 있었다.
다음날 밖으로 끌려 나와 평상복을 입은 일본인과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졌다. 그대로 기차에 실려 북으로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중국 동북지방 타오안청逃安城에 있는 위안소였다. 그곳에서 “사흘 만에 정조를 빼앗겼어요.”라고 말했다. 도망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내 방은 두 줄로 늘어선 방 중에 하나였어요. 겨울이 되면 벽에 두껍게 얼음이 생겼고, 방 양쪽 끝은 홈을 파 놓아 더러운 물이 흘러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어요.” 어떤 날은 하루에 20~3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1년을 생활하던 중, 가정을 꾸려 밖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한 회계 담당 장교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니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뵐 수 있게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조선으로 돌아와, 주인집에서 먹고 자며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런데 1942년 7월, 문옥주 씨는 한 친구로부터 “조금 먼 곳인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식당이 있는데 가지 않을래?”하는 제안을 받게 된다. 이왕 더럽혀진 몸이니 돈이라도 많이 벌자 하는 마음에 가족들 몰래 집을 나왔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부산역 앞에 모인 열대여섯 명의 여성들과 함께 마쓰모토松本라는 이름의 조선인을 따라갔다. 이튿날 군용선에 오르니 조선인 여성들이 300~400명 정도 타고 있었다.
다음은 한국에 가서 직접 대화를 나누었던 이용수(1928~ ) 씨의 사연이다. 1928년생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장녀로 다섯 명의 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물건을 나르는 잡일을 하셨고 가난 탓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아홉 살 때 야학에 잠시 다닌 게 전부였는데, 그곳에서 ‘검둥이’란 애칭의 일본인 음악 선생님에게 노래를 배웠던 시절을 추억했다.
열한 살 때부터 열세 살 때까지 두 해를 제사製糸 공장에서 일했다. 실을 꼬는 작업이었다. 열세 살 때 전매공사専売公社에 시험을 봐서 담배 만드는 일을 해 보았지만, 지독한 담배냄새를 견디지 못해 며칠 일하다 그만두었다. 그 뒤로도 제사 공장으로 돌아와 열다섯 살까지 일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공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도왔다. 남동생이 다섯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집안일로 바빴다. 그 해부터 일요일마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전투모에 몸뻬 차림을 하고 국민학교에 모여 행진이나 방공호 훈련을 받았다.
“나는 피부도 뽀얗고 체격이 큰 편이어서 니시키錦 마을 2반 반장이었어요. 야스하라安原·이용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죠. 교장 선생님을 향해 “머리 왼쪽으로”라는 호령을 하기도 했어요.” 라며, “머리 왼쪽으로”를 일본어로 말하며 경례하는 동작을 해 보였다. 이용수 씨는 지금도 체격이 크고 꽃모양 의상이 잘 어울렸다.
“만 열여섯, 단풍의 계절이었죠.”
라며, 말을 이어갔다. 1944년 가을, 친구와 함께 쑥을 캐러 강가로 갔다. 쑥을 많이 캐서 강가에 묻어 두고는 강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 정신없이 놀다가 해가 져서 문득 제방 쪽을 보니 남자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군복 차림이었고, 그중 한 명은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친구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당황하여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며칠 후 아침, 집 뒤쪽에서 그 친구가 “잠자코 따라 와봐”라며 이용수 씨를 불러내었다. 이른 시간이라 가족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잠자코 친구를 따라 가니 가까운 건널목 한편에 전투모를 쓴 남자와 세 명의 소녀가 있었다. 무서워서 달아나려고 했는데 친구가 “가자”라고 말해서 따라갔다.
남자가 보자기에 싼 보따리를 하나 안겨주었다. 무엇인지 물으니 빨간 구두와 원피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기분이 좋아져 그대로 따라나섰다. 다섯 명이 함께 기차를 타고 경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소녀 두 명과 합류해 일곱 명이 함께 경주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용수 씨는 훗날 가족을 생각해서 갔다고 증언했다. 친구가 “조금 멀리 가는 것이고, 좋은 돈벌이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싸한 빨간 구두와 원피스에도 마음이 끌려 동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친구는 그날 강가에서 남자에게 붙잡혀 감언에 설득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친구도 함께 가자고 말해”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경주에서 묵었던 여관 앞에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어요. 무슨 꽃이에요? 하고 물으니, 도라지꽃이라고 알려주었어요.”
다시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용수 씨는 집 쪽을 보며 울었다. 가족들은 딸의 행방을 알리 만무했다.
“어머니, 어머니, 이 사람들이 (나를) 끌고 가요 하면서 울었어요.”
이미 그때는, 속임수에 넘어간 소녀들은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행은 평양에서 하룻밤 머물고 중국 다롄大連으로 향했다. “우리를 끌고 간 일본인은 말 수가 적었고,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회고했다.
다롄 항에는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윽고 배는 선단을 꾸려 출항하기 시작했고, 이용수 씨 일행은 가장 끝 쪽 열한 번 째 배에 올라탔다. 그 배에는 해군 3백 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배 안에서 1945년 새해를 맞게 되었다.
군인들은 이용수씨 일행에게 한 사람 씩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야스쿠니의
궁 계단 엎드리면
뜨거운 눈물이 복받쳐 오른다
그래 감사의 그 마음
모으고, 모은 그 마음이 나라를 지킨다
이렇게 노래를 하면, 떡을 두 개씩 쥐어 주었다. 이용수 씨는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막힘없이 노래했다.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도 낯익은 멜로디와 노랫말이었다. 이 노래를 ‘황군’에게 강간당한 조선 여성이 지금 내 앞에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천황을 위하여 아시아 사람들을 살해하고 죽어라”라는 명령을 완수하고, 지금은 야스쿠니 신사에 잠들어 있는 남자들. 그 야스쿠니를 찬양하는 노래라는 것을 이용수 씨는 알고 있을까? 여기에 생각에 미치자 나는 마음이 아파 왔다.
배는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심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배 안에서 화장실을 가서 토하고 있을 때, 해군이 다가와 범했어요. 다른 여자들도 모두 이 배 안에서 강간당했어요.”라며, 이용수 씨는 몸서리치며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뢰로 인해 배에 물이 차 큰 소동이 일었다. 크게 흔들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도와주세요!”를 외치며 떨고 있었다. 배 앞부분이 파손된 듯했다. 하룻밤 지나자 전방에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침몰한 것이다. 이용수 씨 일행은 군인들과 함께 다른 배로 옮겨 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타이완이었다. 타이완이 어떤 곳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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