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epilogue
Wanna be Audrey, Wanna be happy!
<플러스 텐>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내가 행복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일까’를 고민하며 지낸 며칠 후, 환이가 미국으로 떠났다. 유상현은 촬영이라는 핑계로 환이를 배웅하지 못했고—아마도 환이가 부담 갖지 않도록 일부러 그런 듯싶었다—나는 환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심해.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라는 이유로 고집을 부리며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와 함께 햄버거를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낸 후, 그를 출국장 안으로 보내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을 눈치 챈 환이가 그의 최고 무기인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바닥으로 내 정수리를 몇 번 톡톡 치며 말했다.
“이래놓고 무슨 나이 타령?”
내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꼼지락거리는 환이의 손을 잡아 내려놓으며 눈을 흘기자 환이가 뜬금없이 “거울 있어요?”라고 물었다. 생뚱맞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에서 콤팩트를 꺼내 열어 거울이 보이게끔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콤팩트를 받더니 거울이 있는 방향을 내 얼굴로 향하게끔 돌렸다.
“보여요?”
나는 그의 질문에 나를 비추고 있는 거울을 봤고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큐빅이 박혀 반짝거리는 작은 핀이었다. 티아라 모양을 한.
“뭐야?”
“뭐긴요. 내가 주는 선물. 공주가 뭐 별거 있어요? 왕인 부모님, 근사한 왕자님, 예쁜 티아라만 있음 돼지. 누나는 그중 두 개는 일단 가졌으니까 공주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요.”
그 말을 마친 환이는 장난스레 경례 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뒤돌아섰다. 한 발짝씩 그가 멀어져갔고, 그만큼 나는 그가 그리워졌다. 환이와 함께 밤새 군것질을 하며 DVD를 보거나, 치열히 경쟁을 하며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멜랑콜리한 상태로 유상현의 흉을 본다거나 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난 환이에게 의지하고,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환이가 여권을 내밀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건넸던 여권을 다시 가져오더니 내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를 보며 ‘어째서?’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는 빠른 속도로 뛰어서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유상현보다 딱 백 배는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올 거니까. 누나의 해피엔드는 내가 만들어줄게요. 그럼 나 진짜 가요.”
환이는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갔고 출국 게이트 앞에서 양손을 번쩍 위로 올려 크게 몇 번 흔들어대더니 출국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게이트를 보며 한참을 먹먹히 서 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도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발견했다. 지은 서였다. 나는 차 한잔하자는 그녀의 제의에 응했고, 대신 차를 마시는 장소는 내가 정했다. 우리는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를 이유로 따뜻한 카푸치노를 두 잔 주문했다. 그녀의 도발을 기다리며 긴장과 견제를 늦추지 않은 채 꼿꼿이 허리를 피고 있는데 주문한 카푸치노가 나왔다. 머그잔에 두 손을 포개는데 그녀가 새하얀 거품을 입술로 살짝 훑더니 ‘이현 씨가 이겼네요’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 순간 카푸치노의 따스함 때문인지 그녀의 발언 때문인지 긴장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하지만 긴장 늦추지 마요. 언제 다시 빼앗아갈지 모르니까. 영원한 해피엔드란 없는 거 알죠?”라고 도전장을 내밀며 쿨하게 웃었다. 나도 그녀에게 웃음을 건네며 답했다.
“네. 그런 상황이 오면 저도 다시 빼앗으면 되겠죠. 영원한 해피엔드는 없는 거라니까.”
혼자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여자라면 누구나 아름답고 싶고, 우아하고 싶고, 매력적이고 싶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아 그 사람과 영원히 해피엔드를 맞이하고 싶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여자들이 동화 속 공주님들과,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워너 비’ 하는 이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이 꼭 해피엔드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잔인한 사실을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는다. 아마 나도 그녀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나 보다.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근사한 남자가 되서 돌아와 내 해피엔드를 책임지겠다고 다짐했던 환의의 맹세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맹세가 거짓은 아니다. 그 맹세를 할 때 그 순간만큼은 절실하고, 진실했을 테니까. 사람이란 시시때때로, 시시각각 그렇게 변하는 존재다. 그래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서글픈 질문이 생기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차가운 대답이 생겨난 거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 소파 위에 편하게 기대 앉아 DVD를 보고 있던 유상현이 나를 보더니 “왔어?”라고 물었다. 아마 유상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사랑의 화살이 언제나 나를 향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환이는 잘 갔어?”
그가 소파 옆자리를 톡톡 쳤다. 그리고 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일찍 끝났으면 오지 그랬어요.”
“그 자식 내가 가면 불편했을 거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휘두르며 물었다.
“영화나 볼까 했는데, 마침 이 DVD가 들어 있더라고. 오드리 햅번 좋아해?”
나는 어깨를 으쓱한 채 되물었다.
“그쪽은요?”
“음, 좋아하기도 하고 존경하기도 해. 아마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와 딸이 함께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한 사람 꼽으라고 하면 그녀이지 않을까. 그녀의 스타일을 교과서처럼 받드는 셀러브리티들이 줄을 섰잖아. 그녀는 셀러브리티들의 셀러브리티야.”
셀러브리티들의 셀러브리티라. 문득, 그녀가 궁금해졌다. 귀여운 동시에 우아하고, 소녀의 표정을 한 채 성숙한 여인을 연기한 <로마의 휴일>의 그녀가 아닌, 육감적인 자기 과시가 아니더라도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티파니의 아침>의 오드리 햅번이 아닌 그냥 오드리가 궁금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