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일 떠나요.”
피자를 오물거리던 환이가 툭 던지듯 말했고 나는 오랜만에 탄산이 가득한 콜라를 마시며 ‘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유학 가려고.”
그래 유학도 좋지, 라며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순간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고는 화들짝 놀라 그제야 머그컵을 내려놓은 채 환이를 쳐다봤다. 유학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단순히 며칠 쉬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아예 유학이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환이를 바라봤다.
“뭘 그리 놀라? 친구 중에 유학 간 애 없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래 인생은 갑작스러운 거야.”
환이 피자의 끝부분을 남긴 채 내려놓고, 새로운 피자 한 조각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이 말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인생 다 살았어?’라고 핀잔을 줬을 것이다. 환이가 여느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말이다. 하지만 환이에게는 애틋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며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환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자랐는지, 또 최근에는 자기를 끝까지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을 낳아준 지은서 때문에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클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누나 나한테 갚아야 할 거 있는 거 알죠?”
단번에는 아니었지만 약 몇 초 후 그가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들고 있던 피자를 빼앗아 한 입 가득 베어 먹으며 장난스럽게 웃었고, 환이는 ‘치사해. 치즈가 제일 많이 든 건데’라며 다시 빼앗아 한입에 집어넣었다. 곧, 그는 목이 메여 죽을 것 같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콜라를 페트병 채로 들이 부었다. 한동안 우리는 진이 빠지도록 깔깔거렸고 배와 목이 동시에 아파와 헥헥 거리며 겨우 웃음을 진정시켰다. 우리는 여전히 실실 삐져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카펫 위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그제야 뱃속 가득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신기하죠?”
환이 물었고 난 “응”이라고 대답했다.
“뭐가요?”
“넌 뭐가 신기한데?”
“다요.”
“나도 다.”
한동안 우리에게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모든 일이 다 신기했다. 내가 만일 <플러스 텐>이라는 잡지사 기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린제이 로한’ 특집 기사 따윈 쓸 일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유상현의 차를 박았을까? 유상현의 차를 박지 않았다면 내 명함이 유상현의 차에 놓일 리도 없었고, 또 그랬다면 환이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우연이 또 하나의 우연을 낳고, 그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낳고. 그 우연 중에는 운명도 있었을 것이고, 그저 가벼운 우연으로 끝나버린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그 일들 사이에서 나는 유상현과 환이라는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다.
“이 집에서 처음 밥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섯 달이 흘렀어요.”
멍하니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있을 때, 천장에서 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 환이를 쳐다봤다. 환이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 역시 다시 천장을 쳐다봤다. 하긴 한 달에 한 번씩 쓰는 셀러브리티 기사를 이제 다섯번째 썼으니 만 오 개월이 지났을 거다.
“아참, 나 지은서 만났어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지만 난 최대한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아… 그랬구나. 어땠어?”라고 물었다. 어쨌거나 환이에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였다.
“뭐, 가족에 관해서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인정 안 한다고 해서 변하는 사실은 없으니까. 그래서 그 여자도 유상현도 일단은 용서하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하지만 이해는 안 할래요. 누나 그거 알아요?”
“뭘?”
“오드리 햅번이 아들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일을 중단한 거요. <어두워질 때까지>라는 영화 촬영 중에 아들 숀
이 너무 보고 싶었다나? 그때 그녀는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대요. 둘째 아들 루카를 낳은 후 오드리는
‘인생은 너무 짧아’라고 말한 후, 십 년이 넘도록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대요. 그리고 그녀는 결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해요.”
아마 환이가 마지막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그런데 왜 지은서는 일이 먼저였을까요?’나 ‘모든 사람이 다 오드리 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뭔가 씁쓸해하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화제를 바꾸려 그에게 물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유학 갈 때 필요하거나 뭐 그런 거.”
내가 물었고, 환이는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장을 보고 있던 몸을 뒤집어 양손에 턱을 괴고 누웠다. 눈을 살짝 올려 뜨자 환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환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고 점점 더 내게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바로 내 입술 앞까지 다가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려고 할 찰나 환이가 다시 몸을 뒤집어 천장을 향해 누웠다.
“뭐 그런 건 없고. 나한테 갚아야 할 거나 갚아요.”
“그게 뭔데?”“나 유학 갔다 올 때까지 내 맘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땐 유상현이랑 헤어져요. 그런데 아마 불가능하겠죠? 사방에 금발의 쭉쭉빵빵 바비인형들이 넘쳐 나는데 누나 정도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금세 까먹을 거야. 그지? 누나도 참 안됐다. 이런 영계를 내비두고 애 딸린 유상현을 택하다니.”
혀를 끌끌 차며 오버스럽게 말하는 환이가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환이가 돌아간 후 ‘다이애나 비’ 기사를 찬찬히 마무리 지었다. 편집장님께 기사를 첨부한 메일을 보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엎드려 누워 인터넷을 하다 문득 환이가 말한 ‘오드리 햅번’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무의식적으로 검색창에 ‘오드리 햅번’을 쳤다. 사실 내게 ‘오드리 햅번’ 하면 떠오르는 것은 <로마의 휴일>과 ‘아이스크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걸 기억하는 듯했다. 오드리 햅번을 사랑한다는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블로그 상단에 ‘오드리 햅번’이 한 말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라며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삶은 행복한 일과 행복한 인생의 조합이다”라는 글을 적어놓았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며 중얼거리는데, 과연 난 지금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주부, 작가, 의사, 정육점 주인, 요리사 등의 직업 중 어떠한 직업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일을 선택해서 하게 된 이유는 단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일이 좋아서나, 아님 돈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후자 쪽이다. 그래. 내가 원했던 패션 잡지사 인턴을 그만두고 <플러스 텐>에 온 이유도 돈 때문이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미래의 주거지를 위해 청약통장을 마련하고 결혼을 위한 적금도 들 수 있는, 가끔은 큰마음 먹고 몇 개월 할부로 명품 신상 백을 질러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그런 안정한 직장을 원했던 것이다.
사실 <플러스 텐>에서 기사를 쓰면서 단 한 번도 성취감이나 뿌듯함,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던 듯했다. 그나마 방금 마침표를 찍은 ‘다이애나 비’ 특집 기사가 가장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성의 있게 쓴 듯했다. 그날 밤, 어디서 구입했는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고 나서 꽤나 뿌듯해 했던 ‘세계명작영화100선’ DVD를 꺼내 그중에서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과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을 골라 봤다. 해가 뜰 때까지 새삼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매료되어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편집장님이었다.
‘다이애나 기사 너무 밋밋해. 그녀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방향으로 좀더 자극적으로 갔으면 좋겠음.’
그 문자를 읽으며 티비 화면에서 너무나 사랑스럽게 활짝 웃고 있는 그녀가 말했다는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삶은 행복한 일과 행복한 인생의 조합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한 번쯤 그렇기 위한 시도를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드리 햅번을 보며 마치 그녀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행복한 일을 갖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나요?’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