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진짜 미안. 하…하지만! 이현이 네가 먼저 내 비밀을 발설했잖아?”
유상현의 도움으로 화보 촬영 현장에서 만나게 된 변태지가 나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마냥 화들짝 놀란 후, 억울한 듯 꺼낸 말이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니 비밀을 아는 게 뭐… 혹시 커밍…”
변태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달음에 바로 앞에 달려와서는 오른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빈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억울한 듯 말했다.
“그걸 알린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어. 믿을 만한! 근데 강윤지가 니가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했어.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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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자의가 아닌 타인의 고의에 의하여 밝히게 되는 것. |
‘한국의 게이 디자이너들’이란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만약 자기를 돕지 않으면 날 아웃팅*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알고 있는 걸 말해주지 않는다면 즉시 아웃팅시키겠다고 했다고. 그리고 이런 일을 아무한테나 떠벌리고 다니고, 기사까지 쓰겠다는 백이현이 얄밉지 않냐고. 사실, 나도 유상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니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해서.”
“자, 잠깐. 내가 니 비밀을 퍼뜨리고 다녔다고? 미쳤어? 내가 사랑했던, 한때 내 연인이었던 남자가 커밍아웃을 했
다는 기가 막히다 못해 기절할 것 같은 일을 내가 내 입으로 퍼뜨린다고?”
흥분해 쏘아붙이던 내 말을 의아한 표정으로 듣던 변태지는 벙찐 얼굴로 “아,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당연하지. 넌 강윤지한테 넘어간 거야.”
변태지는 그제야 자신이 오해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갖가지 사과 퍼레이드를 펼쳤다. 그런 변태지에게 더 이상 윽박을 지를 수가 없었다. 그도 강윤지한테 당한 것이니. 하지만 내가 받은 정신적인 손해에 대한 보상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그에게 화를 낼 수 없다고 해서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웃팅 협박으로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는 태지에게 이중삼중의 스트레스를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업자득, 결자해지. 결국 이 일을 만든 두 사람과 이 일을 끝내야만 했다. 우선은 강윤지부터였다. 도대체 이해도, 용서도 되지 않는 이 여자부터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난 변태지에게 당장 강윤지에게 전화를 해 근처 커피숍으로 불러낼 것을 명령조로 부탁했다. 그리고 변태지는 쭈뼛거리며 내 부탁을 곧바로 실행했다.
강윤지는 약 한 시간 후에 커피숍에 도착했다. 두리번거리며 변태지를 찾던 그녀는 변태지가 아닌 나를 발견하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급하게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목을 힘차게 잡으며 말했다.
“왜 가요? 우리 할 이야기 있지 않아요?”
“…난 없는데?”
쓰윽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하는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듣기만 할래요? 또 한 건 터뜨릴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분노로 인해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선 채로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녹음기나 메모할 수첩을 꺼내놓지는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일 분에 한 번꼴로 물컵을 들더니 입을 축였다. 겨우 꺼낸 ‘대체 왜 그런 거예요?’라는 나의 질문에도 그녀는 한동안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참의 기싸움이 끝나고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보처럼 정보를 흘리고 다닌 그쪽이 나쁜 거야. 회식하던 날 유상현과 하얏트에서 만나기로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 그게 시작이었어.”
내 기억으로 그날 난 충분히, 아니 오버스러울 정도로 조심했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누군가에게 통화 내용을 들킨 것도 내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마땅한 대꾸의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 나를 본체만체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현 씨는 지금 원하는 거 다 가졌잖아.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강윤지 씨 태도요. 최소한 내 이야기를 그렇게 팔아먹었으면 내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이현 씨도 날마다 사과해야겠네. 린제이 로한, 패리스 힐튼, 안젤리나 졸리, 그리고 이현 씨가 늘 쓰고 있는 그 기사의 주인공들한테. 그게 우리 직업이잖아? 남의 이야기를 팔아먹고 그걸로 먹고 사는. 기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딱히 뭐라고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내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녀의 말투가 재수 없긴 했지만 그녀의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연예인처럼 공인인 사람의 이야기를 늘 쓰고, 그 이야기로 먹고 사는 게 연예부 기자였다. 기자는 사람의 직업이면서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양심보다는 특종이 우선이었고, 진실성보다는 스피드가 더 중요했다. 내가 이 일에 대해 문외한이었다면 지금 그녀를 잡고 양심이나 진실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 운운하며 따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쪽 업계에 대한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일어나 한숨을 쉬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현 씨는, 어울리지 않아.”
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몇 번 눈썹을 씰룩거리더니, 몇 번이나 말을 삼 킨 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기자 말이야. 특히나 이런 연예부 기자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감정을 읽어. 그리고 미안하단 이야기는 안 해도 되지? …그냥, 직업 정신이 너무 투철했던 기자가, 아니 왕자를 남몰래 사랑하고 동경하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시녀가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고소하든가.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한동안 멍하니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왕자를 남몰래 사랑하고 동경하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시녀라. 변태지가 왕…자 일리는 없고. 혹시 그도 유상현을 좋아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입사를 한 후 그녀와 처음 대면했던 날, 회식자리에서 ‘왜 기자가 됐어요?’ 라는 내 질문에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을 만큼 좋아했던 연예인이 있었어요. 뭐, 그와 연애를 한다든가 하는 이런 허무맹랑한 꿈은 이미 접은 지 오래고… 그래도 좀더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을까 해서 기자가 됐는데… 웬걸요? 이게 딱 내 적성이더라고요’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게 만일 유상현이라면,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애초에 포기했던 자신의 왕자님을 자기보다 더 허술하고 빈틈투성이인 내가 가졌으니 그녀의 분노와 질투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고 싶고, 부숴버린 다음에는 그 조각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는 지은서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을까. 자기가 인정할 수 없는 나보다야 자기가 인정할 수 있는 공주였던 지은서의 시녀가 돼서라도 말이다.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그녀의 행동 전부를 납득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싫었다. 같은 기자로서,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그녀를 이해하는 것과 직접 내가 겪었던 일들에 비춰 그녀를 용서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그럼 난 가도 되지?”
남은 물을 마저 비운 강윤지가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보지 않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커피숍 문이 열리고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왔다. 유상현이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 걸음을 멈춰선 유상현은 놀란 나에게 성의 없이 눈인사를 한 후 고개를 쓰윽 돌려 강윤지를 바라봤다.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한 강윤지는 잠시 입을 벌린 채 유상현을 바라보더니 곧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곧,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유상현은 빈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며 내 앞에 놓여 있던 오른손으로 물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얼어 있는 강윤지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히, 하지만 차갑게 말했다.
“난 꼭 기자가 남의 꽃밭을 망치는 일만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강윤지 기자님은 그게 전문이더군요?”
예상치 못한 그의 발언에 나와 강윤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시에 유상현을 바라봤다.
“한 번쯤은 인심 써서 남의 꽃밭에 물도 주고, 햇볕도 좀 쬐어주고 해봐요.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한층 더 냉정해지며 최고조에 달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 꽃밭을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까. 내 마지막 경고예요.”
그렇게 말을 마친 유상현은 거짓말처럼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바꾼 후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강윤지는 붉으락푸르락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낚아채듯 가방을 들고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난 곧바로 유상현을 바라보며 ‘여긴 어떻게?’라고 물었고, 유상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었다.
* * *
그날 밤, 열 통 가까이 온 전화를 외면한 편집장님께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이 다이애나 비 기사를 넘겨야 하는 원고 마감일인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다이애나 비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플러스 텐을 그만두기로로 마음먹었다. 딱히, 새로 할 일을 정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살 수는 없다는 생각만은 분명했다.
-과연 다이아가 박힌 티아라는 ‘행복’만을 안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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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거의 마무리 지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서둘러 문을 열어보니 양손에 피자와 콜라를 하나씩 들고 있는 환이가 사랑스럽게 눈을 찡긋거렸고, 난 반사적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온종일 분노와 떨림, 긴장으로 두근거렸던 심장이 환이를 본 그 순간 마법처럼 고요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