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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유상현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들의 언론 플레이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애써 조용히 쥐죽은 듯 지내기 시작한 지 이 주 후, 유상현과 나의 비난으로 뒤덮였던 인터넷에 우리에 대한 옹호 글들이 하나둘 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어쨌거나 아이를 버린 건 지은서도 마찬가지잖아. 소문엔 유상현이 그 아이랑 같이 산다고도 하던데. 지은서가 20년 가까이 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것도 이해 안 감. 여튼 애만 불쌍. 쯧쯧. ㅡ.ㅡ;;;-
-사실, 유상현이 티비에 나와서 막 가식 떨고 그러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그리고 아직 유상현이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끼리 왈가왈부 유상현만 아들을 버린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우는 건 성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듬. @.@ -
-아, 다 필요 없고 유상현 이번 영화 대박이드라. 어차피 난 배우 유상현을 좋아하는 거임.^^*-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사진의 주인공인 나조차 출처를 전혀 가늠 할 수 없는,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내 모습의 사진들을 첨부시킨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빈틈투성인 여자가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울 리 없음. NEVER~~~ ㅋㅋㅋ-
이걸 고마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히 헷갈리는 게시물을 웹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괜찮다는데 다들 왜 이럼? 나는 솔까 지은서가 더 수상함 >.<-
라는 글로 시작된 게시물에는, 유상현과 내가 함께 있는 장면이 찍힌 사진도 있었다. 실시간으로 엄청난 수의 댓글이 달렸고 빠르게 스크랩 수가 올라갔다. 상황역전의 정점을 찍은 건 ‘유상현의 조카라고 알려진 자신이 유상현의 아들이며, 자신은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유상현은 자신에게 최고의 삼촌이었고 앞으로 최고의 아버지가 될 거다’라고 한 웹 사이트에 올린 환이의 글과, 그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사고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유상현에게 연락을 해준 기자가 올린 지은서와 강윤지에 대한 기사였다.
‘유상현 스캔들 제1호 기사의 주인공 강윤지, 지은서와 수상쩍은 만남?’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그녀들이 청담동의 한 와인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미묘한 각도로 찍은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기사는 곧바로 일파만파 퍼졌고 실시간으로 그와 유사한 내용을 다룬 기사들이 앞 다투어 올라왔다. 다음 날, ‘지은서, 일본 한 재벌과 비밀 만남을 가지다 얼마 전 이별’이란 내용의 기사까지 떴다. 지은서가 일본 재벌에게 버림받은 후, 의도적으로 한국에 돌아왔고 이미 떠나간 유상현과 그 아들을 노렸다는 그럴 듯한 기사가 뒷받침되면서 그 순간부터, 유상현과 나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은 지은서와 강윤지에게로 살짝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치밀한 건 백이현이 아니라 지은서와 강윤지다’, ‘지은서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강 기자는 기자 타이틀을 버려라. 기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제발 낚시질이나 거짓과 과장으로 우리를 우롱하지 말아라’, ‘악플, 악성 루머를 단 네티즌도 잘못이지만 잠잠한 호수에 돌을 던진 건 강 기자 너다. 혹시 백이현이 부러웠냐?’라는 식의 여론도 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환이와 유상현이 삼촌과 조카로 지낼 때 다정했던 모습, 그리고 최근에도 별로 달라진 바 없는 사진들이 올라왔고, 나와 환이, 유상현이 다정하게 있는 파파라치 사진까지 뜨면서 상황은 천하의 지은서라고 해도 역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로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유상현의 예측대로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여론이 우리 편으로 돌아섰다는 판단이 섰을 때, 유상현은 소속사와 합의 하에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이 앉아 있는 널따란 회견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기 전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정중히 사과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물의를 일으킨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공인이라는 점은 항시 잊지 않고 살지만, 그전에 저도 그리고 지은서도 불완전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여러분을 실망시켜드린 점은 깊이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더 신중하고 성숙된 공인의 모습으로, 또 더 좋은 작품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으로 이번 일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전 분명히 제 의사를 밝혔고, 이 이상 억측성 기사나 루머는 법적으로 강경히 대응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한 번 인사를 한 그는 기자 회견실을 빠져나왔다. 짧은 그의 말에 몇 시간 진을 치고 기다렸던 것이 허무해져 멍해진 기자들이 수많은 질문을 쏟아댔지만 그는 인터뷰를 거절하며 꿋꿋이 걸어 나갔다. 기자들은 내 이야기도 쉴 새 없이 물어댔다. 묵묵히 걸어가던 그가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가장 가까이 있는 기자가 들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아 들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전 지금 한 여자분과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지키려고 노력하겠지만,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한다는 맹세를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연애를 하며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다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스타와 일반인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녀가 우리의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두 사람, 아들과 그 여자분의 이름 앞에 유상현이란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건 원치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꼿꼿하고 도도하고 저 잘난 유상현이 눈가에 살짝 눈물마저 고인 채, 진심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부탁했고, 그의 연예 생활을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베테랑 기자들부터 카메라와 마이크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유상현의 모습, 그리고 베테랑 기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전한 간결하지만 진실했던 진심은 통하면서 네티즌들은 조금씩 그의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자신은 유상현과 백이현의 편이었다는 사람부터 ‘비양심적이고 악의적인 지은서를 심판해야 한다’, ‘강윤지의 얼굴을 밝혀라’라는 글까지 심심찮게 올라왔다. 지은서를 비판하는 네티즌들과 옹호하던 네티즌들의 다툼이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후 터진, 다른 톱스타의 열애설과 섹스 스캔들, 그리고 일본 톱스타의 마약 스캔들로 인해 그 사건은 점차 사그라졌다.
역시나 영원한 가십은 없나 보다. 게다가 가십은 가변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긴, 한 가십이 그리 오래 지속된다면 셀러브리티들의 수도 한정될 것이다. 돌고 도는 가십. 그로 인해 셀러브리티들도 숨을 쉬고 여유를 찾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서로 돌아가며 가십거리를 만들면서 상대에게 휴식을 줄 수도 있다는 헛헛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라가 어수선할 때 스크린(screen, 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 또는 스피드(speed)에 의한 우민(愚民) 정책을 겨냥한 기사거리를 많이 만드는 맥락과 같이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공격의 상대만을 계속해서 바꾸며 가십 문화, 네티즌 문화에 참여하고 있다.
사건이 거의 끝나갈 무렵 유상현이 ‘이제 그들에게 네가 복수를 할 차례야. 어떤 피의 복수를 원해?’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생했다는 듯 내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으며 물었다. 복수라… 하지만 강윤지는 이미 네티즌 수사대들에게 커다란 곤욕을 겪었을 거고, 변태지는 언제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지 모르는 조마조마함에 하루하루를 가시방석 위에서 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은서는 정말 유상현의 말대로 자신이 이용한 언론에 자신이 그대로 재공격을 당했다. 이미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을 그들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넘쳐났던 분노 게이지가 급하게 하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난 일이니까’라고 여기며 바보처럼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그들을 한 번쯤 만나볼 필요는 분명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