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여기저기 차 박고 다니는 게 취미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의아해진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네?’ 하고 지금 상황과 전혀 맞지 않게 얼빵한 표정과 말투로 되물었다.
“저번엔 내 차, 이번엔 가드레일. 무슨 카트라이더 선수도 아니고. 여기 쿵, 저기 쿵.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하다. 민폐야. 너 같은 애가 운전하고 다니는 거.”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발언에 스르륵 긴장이 풀려버린 난 피식, 하고 조그맣게 웃어버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유상현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아, 전화 왜 안 받았냐고 물었지? 잃어버렸어. 사건 터지자마자 정신없었거든. 환이 일을 비밀로 하고 속인 건 내 잘못이니까. 소속사에서 일단 얌전히 있으라는 말에 따랐지. 하긴, 이럴 땐 잠잠히 있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긴 해. 그들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쯤 입을 여는 게 최고거든. 미안.”
“…”
“아, 매니저 번호로 몇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문자를 남길까 했는데 혹시나 누군가 네 핸드폰을 훔쳐갔을까 봐. 그 문자를 또 누가 보면 큰일이잖아.”
“아… 그랬구나.”
조용히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 번호는 죄다 기자들이나, 걱정하는 척하면서 이 일에 관해 은근슬쩍 물어댈 얄미운 지인들의 전화로 치부해 받지 않은 나였다.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받지 않았던 전화들 중에 그의 전화가 있었을지도.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가 병원에 있다는 검색어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 같은데 그는 나보다 더 멀쩡해 보였다. 조금 해쓱해지긴 했지만 창백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조금 답답해하는 것 외에는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입원은… 왜?”
“그나마 병원이 가장 안전한 휴식처거든. 스트레스 때문에 평소보다 세 배나 무거운 머리를 들고 사는 것 같아.”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전화를 못 받았다니. 그동안 해왔던 그 무수한 상상 중에 저런 건 없었다. 하긴 그 상황에서 통화를 한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었을까. 왜 자신을 속인 거냐고, 왜 솔직히 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짓말을 한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만난 이상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와 끝나버린다고 해도,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말해야만 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저, 그 일은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해.”
유상현이 내가 그토록 힘들게 꺼낸 말을 너무나도 쉽게 끊어버렸다. 마치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지나간 일에는 그렇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고. 환이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 지금 내가 계속 신경 쓰이는 사람이 너라는 사실. 그리고 난 절대 지은서랑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 확실하면 되는 거 아냐?”
“…나한테 화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물론 났지. 처음에는. 그런데 기사에서 떠드는 대로 믿기에는 네가 너무 허술했던 게 생각나서. 기사로 보면 네가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지능적으로 행동했다고 하던데… 뭐,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도 있긴 하겠지만 신경 안 써. 뭐, 너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버렸을 테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라는 대목에서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데 힘이 실렸던 탓인지 머리가 어질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고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꺼낼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유상현의 차를 박게 된 진짜 계기. 우연인 줄만 알았던 환이와의 만남. 그 만남으로 유상현을 속이게 되고 환이에게는 상처를 주게 된 것. 지은서와의 만남. 변태지에게 나도 모르게 술에 취해 나불거린 이야기. 강윤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조리 이야기, 아니 고백해버렸다. 유상현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했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며, 때때로는 괘씸한 눈빛과 어이 상실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가 그 정도로 치밀하거나 똑똑하진 않다고 판단했어. 그들은 아마 니가 얼마나 허술하고 바보 같은지 모르고 엄청나게 과장된 소설을 쓴 거지. 린제이 로한 기사 하나 때문에 무작정 차를 박고, 그쪽 이야기 하나로 객기를 부리고,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술 먹고 나불거리는 허술한 애 라는 건 몰랐을 테지.”
“내가 허술하긴 뭐가 허술해요?”
나는 살짝 발끈하며 열을 올렸다.
“아니야? 얌전히 지내도 모자랄 판에 날 만나러 병원 오다가 사고 당해. 아, 나 만나러 온 거 맞지? 아닌가?”
난 모른 척 대답을 회피했다.
“방금 교통사고가 난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나. 아, 그러고 보니 좀 눕지 그래? 뭐 필요해? 물 마실래?”
유상현은 괜찮다는 나를 애써 눕히고는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서는 ‘먹을 게 별로 없네’, ‘냉장고가 뭐 이렇게 더러워?’ 등등을 중얼거리면서 유상현은 매니저를 시켜 생수와 종이컵을 새로 사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상현의 매니저가 생수와 종이컵 그리고 과자와 음료수들을 잔뜩 담은 봉지를 양손에 쥐고 왔다. “거기 두고 나가”라는 유상현의 말에 덩치 좋은 매니저는 나와 유상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저기, 별 다른 일은 없어요? 제 사고 소식은…”
“없어. 니 사고를 바로 목격한 기자가 놀라서 내 매니저에게 전화했더라고. 초짜였나 봐. 꽤나 당황했더라고. 네 사고가 자기 때문이라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 사람이 조용히 앰뷸런스 부르고, 정리했더라. 자기가 지은 죗값은 어느 정도 치르고 간 거지.”
유상현이 생수를 꺼내 종이컵에 따르며 말했다. 끈질기게 날 쫒아왔던 그 기자가 유상현에게 연락하고 내 걱정까지 해줬다고? 나도 모르게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직 우리나라 파파라치들에게는 양심이 자리하고 있나 보다. 사고 현장을 ‘기사거리를 찾았다’는 들뜬 마음으로 정신없이 사진을 찍기보다는 우선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니. 어쩌면 유상현 말대로 초짜여서 기자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더 먼저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난 유상현이 건넨 물을 마시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강윤지, 변태지라…”
유상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난 물 마시는 것을 잠시 멈춘 채 그를 쳐다봤다.
“난 변태지가 더 싫은데, 넌?”
유상현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성난 듯 중얼거렸다.
“네?”
“그 자식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어. 분명 둘이 거래한 게 있을 텐데. 유상현을 만만히 본 거지. 변태지 디자이너 생활 5년. 강윤지 기자 생활 3년. 둘이 합해도 나보다 안 되는 것들이. 나와 매스컴을 너무 쉽게 봤어.”
유상현은 말을 하다 말고 아까 물과 함께 꺼낸 허쉬 드링크를 찢고선 내 종이컵을 빼앗아 그곳에 따랐다. 그리곤 벌컥벌컥 들이켰다. 쓰윽, 입을 닦은 그는 마치 예전의 환이가 보였던 작은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걱정 마. 곧, 상황 역전 될 거야”라고 말했다.
“…어떻게요?”
“매스컴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완벽히 치밀하지 않은 이상 매스컴에게 역으로 당하게 되거든. 왜 지은서가 이번엔 그걸 간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게 아닐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쳤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따위를 실천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에서야 더 확실히 느낀 건 나도 그녀만큼이나 그가 간절했다. 아니 어찌 보면 그녀보다는 아닐지 몰라도, 사랑에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그런 비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유상현이 최상인 것처럼 나에게도 유상현은 최상이다. 누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지 이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고상한 척, 착한 척, 약한 척, 남을 위하는 척, 하면서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그런 행위는 이제 바라지 않는다.
“뭐 먹을래? 너 단 거 좋아하지? 이거? 아님 이거?”
엄청나게 큰 비닐봉지 안에 머리를 박다시피 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내 물어보는 그가 그 순간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난 대답 대신 유상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유상현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 씁쓸한 초코 향을 아득히 느끼며 난 내가 무사함에, 그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배우 유상현이 아닌, 단지 한 남자 유상현으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녀가 사랑하는 데는 신분, 사회적 위치 따위는 필요치 않다. 사랑을 하는 남녀는 동등하며, 오로지 몸과 마음만이 필요하다. 상대를 나보다 우월한 누군가로 받아들인다면, 나보다 낮은 무엇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나고 만다. 아마 다이애나와 찰스 황태자가 이별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