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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하게 낀 저 먼 곳에서 근사한 턱시도를 입은 남자와, 스스로 빛을 발할 정도로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 아련히 보였다. 언약식을 하는 듯한 실루엣을 그리는 그들의 그림은 마치, 동화 속 해피엔드의 한 장면처럼 다정하고, 성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여자가 하얀 손을 내밀자, 남자가 반짝이는 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주려 했다. 얼핏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유상현. 분명 그였다. 그렇다면, 지금 유상현이 누군가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건가?
갑작스레 다급해진 난 여자의 정체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뛰었지만 뛰면 뛸수록 그들은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단지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만은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앞에서 이제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는 듯 충만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이 드디어 보였다. 그녀는… 지은서였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힘차게 뛰어가던 내 발이 멈춰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낭떠러지가 보였다.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나는 아마 하염없이, 끝없이 추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추락 전의 공포와, 두려움, 쓸쓸함, 그리고 사랑으로 인해 얻었던 상처의 자국들은 나와 함께 흔적 없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어릴 적 잠들 때마다 수없이 들었던 왕자님과의 해피엔드는 내 몫이 아닌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한쪽 발이 허공을 내딛었다. 질끈 눈이 감겼다. 아찔함의 힘을 빌려 나머지 한쪽 발마저 허공에 맡기려는 순간, ‘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라는 단지 제목만 동화 같았던 책에서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와 닿았던 문구.
‘더 눈부신 해피엔드를 맞고 싶다면, 하루를 시작하는 그 순간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것인지 사랑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 애인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소용이 없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것을 결정해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올바로 사랑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서 상대에게 사랑해달라고 요구했던가? 단지 왕자님을 기다리며, 비싼 백을 들고, 고급 숍에서 마사지를 받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던 내가 과연 나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완벽히 위반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히 한 발을 다시 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아득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내 몸이 휘청거렸다. 온몸이 허공에 가뿐히 내려앉는 순간 억울함과 미련이 몰려왔다.
‘아직은 죽기 싫어. 난 아직 목숨 걸고 사랑을 한 적도, 온 힘을 다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나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지 못했어. 남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셀러브리티를 원하기 전에,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싶어.’
순간 번쩍 눈이 뜨였다. 안개 낀 낭떠러지들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병실 분위기가 풍기는 다섯 평 남짓한 방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하나 보였다. 오른손을 들어 두 눈을 힘껏 비비자 그 형상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이자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눈 앞에 보이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상현이었다. 당황해 허리를 일으키자 삐끗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서야 사고가 났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가드레일을 박은 내 차. 희뿌옇게 피어오르던 연기. 희미하게 들리던 앰뷸런스 소리. 그 모든 상황이 하나씩 떠오르자 난 그제야 내 두 손과 두 다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급하게 그들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멀쩡했다. 난 오른손을 뻗어 유상현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허리를 살짝 숙인 난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인 듯한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안타까움이 샘솟았다.
그가 눈을 뜨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까는 대체 무슨 용기로 그가 있는 병원까지 올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박은 가드레일은 무사할까? 공공기물 파손으로 법정에 서야 하거나 뭐 그러진 않겠지? 날 따라오던 그 기자의 손에 의해 ‘이제는 공공기물까지 파손한 백이현’ 뭐, 이런 식의 기사가 나진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덕에 이제는 두통에 갈증까지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 옆에 미니 냉장고가 보였다.
분명 저 안에 갈증을 해소할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이불을 들춰내고 한 발을 조심스레 침대 밑으로 내딛었다. 하지만 바닥을 디딘 발은 맥없이 무너져버렸고 그 바람에 난 ‘윽’ 소리를 내며 유상현에게로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잠에서 깬 유상현의 눈과 마주쳤다. 하필 이런 모양새로 유상현과 다시 마주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난 얼른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울로 지금 내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내가 머뭇머뭇 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유상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신 좀 들어?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어?”
유상현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정말 유상현을 만나고 그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나를 보며, 자신이 호들갑을 떨었다는 걸 알았는지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애써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대체, 왜 병원에 있어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해요’ 중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했지만 정작 튀어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억울한 듯 내뱉은 말은 “대체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였다. 하지만 유상현은 내 질문을 간단히 무시하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말야.”
유상현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덜컥 겁부터 났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눈썹을 찡긋해 보이더니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