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이 비운 머그잔을 싱크대로 가지고 가던 환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말을 꺼냈다.
“응?”
“오는 길에 슬쩍 들렀는데 취재진들 장난 아니었어. 저번보다 더 심하던데? 쓱, 모르는 척 지나가니까 옆집 사는 사람이냐고 잡고 묻는 통에 심하게 짜증내주고 왔어.”
“…어떻게?”
“당신들!”
싱크대 반대편으로 몸을 홱 돌린 환이가 오른손을 쓰윽 들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당신네들 맘대로 기사 쓸 거면서 왜 몰려와서 귀찮게 구는 건데!’라고”
순간, 환이가 한 말이 그들이 아니라 나에게 한 말인 듯 착각할 정도로 가슴 한 켠이 찌릿했다.
“나 그리고 애마 생겼어요.”
“애마? 차?”
“아니, 오토바이. 유상현이 미국 갔다 오라고 준 경비로 하나 구입했죠. 음… 오토바이엔 신기한 힘이 있어요. 치유 능력 같은 거?”
“치유 능력?”
“응. 오토바이랑 하나가 돼서 달리면 엄청 집중하게 되거든요? 바람이랑, 도로랑, 오토바이, 그리고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러다 보면 다른 일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하하. 답답할 땐 언제든 말해요. 신나게 소리 지르게 해줄게요.”
라고 말하는 환이의 표정이 너무나 천진난만해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곧, 태이가 돌아왔고 환이는 볼 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태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양손에 들고 온 커다란 봉투를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과자들을 꺼냈다. 그러더니 “먹을래?”라고 묻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바나나킥 과자 봉지를 힘 있게 뜯더니 내 입에 하나 불쑥 넣어주었다.
스르륵, 바나나킥이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그 달콤함에, 아니 태이의 따뜻하고 달콤한 배려에 문득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과자를 먹으며 데면데면한 상태를 유지했다. 빈 과자 봉지로 만든 딱지가 다섯 개 정도 주위에 굴러다니고, 혀가 단맛과 까슬함에 지칠 때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나한테 말하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뭐, 죽을 때까지 비밀 지킬게, 라고는 말 못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아무 쓸모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르기 전까진 지킬게. 꼭!”
난 잠시 멍하니 그렇게 말하는 태이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그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아, 드라마틱은 꼭 굴곡이 있어야 하는 거 알지? 기.승.전.결. 클라이막스. 하하. 마지막은 꼭 해피엔딩이면 좋겠어’라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는 태이의 말에,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순간, 지금껏 내게 지나쳐간 일들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드라마틱한 인생! 어쩌면 항상 바라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좋아 보이기만 하던 드라마틱한 인생의 이면을 알았다면 그토록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틱한 인생은 절대 순탄할 수 없는 거니까.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프고 험난한 길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순탄하기만 한 드라마를 누가 보겠냐고. 아슬아슬함과 조마조마함을 반복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바로 드라마의 묘미 아니냐고.
문득 드라마틱한 인생을 바라며, 순탄하기만을 바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모든 드라마에 있는 굴곡처럼, 마치 롤러코스터의 그것처럼 신나고 즐겁고 쉬운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어렵고 힘든 거라고. 지금 이 순간만 지나면 다시 조금은 쉽고 즐겁고 행복한 곳으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유상현의 전화가 없다는 게 자꾸만 걸렸다. 대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뭘 하기에 전화 한 통 없는 건지 답답하고 걱정됐다.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지금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으로만 보면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를 이용했다. 차라리 따져 묻거나 화라도 냈으면 좋겠는데,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해 나를 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실망으로 아예 내게서 돌아서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 *
이틀째 무단결근을 한 후, 하루 종일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유상현에게 전화를 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만을 반복했다. 내가 깬 것은 다름 아닌, 태이의 호들갑 때문이었다.
“야야야, 이것봐봐. 집에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네비게이션으로 티비를 봤거든? 근데…”
라고 말하며 다급하게 거실 티비 전원을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멈춘 곳에서 지은서의 기자회견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난 반사적으로 무거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두 눈을 비벼대며 티비 앞으로 기다시피 갔다.
지은서가 수십 명이 되는 기자들 앞에서 청초한 차림과 창백해 보일 정도의 화장을 한 채 슬픈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을 질문에 차분히, 하지만 똑똑히 대답하고 있었다.
“정말 유상현 씨와 지은서 씨 사이에 아들이 있는 겁니까?”
“…네. 본의 아니게 그동안 여러분을 속인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지은서의 말에 기자회견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지은서는 애써 울음을 참다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울었다. 그녀의 눈물에 기자회견장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었지만,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는 그에 반비례하는 듯했다. 한동안 울던 그녀가 눈물을 닦고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땐 정말 바보 같았어요. 덜컥 겁부터 났거든요. 그런데 차마 지우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내 아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어리고 아무 힘도 없는 제가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의 생명까지 제멋대로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럼,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다가 이제 와서 아이와 유상현 씨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죠?”
그 질문에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지은서의 눈이 조용히 반짝반짝 빛났다.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질 듯한 그녀의 모습에 기자들은 잠시 쏟아 붓던 질문을 멈추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