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이가 테이블 위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 두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빈 의자에 앉을까 말까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대며 나와 환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 그러고 보니 우유가 없네! 금방 사올게. 둘이 이야기하고 있어’라며 다소 오버스러운 말과 행동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분명, 코코아 만들 때 우유를 넣었다. 그리고 그 우유팩을 다시 냉장고 안에 넣어둔 것도 알고 있다. 어쨌거나, 그런 태이의 배려에 감사했지만 그녀가 떠난 후에도 환과 나는 한참을 말없이 그녀가 남기고 간 코코아 마시기에 열중했다.
양손에 커다란 머그잔을 잡고 코코아가 담긴 컵 속으로 코를 폭 박은 채 코코아를 후르륵대고 있는 나뿐 아니라 환이도 어떠한 말을, 어떻게, 무엇부터, 어떤 표정으로, 심각하게? 아님 우스꽝스럽게? 꺼내야 할지에 대해 갈피를 못 잡은 채 고민 중일 것이다. 난 그 자세 그대로 살짝 고개와 눈을 치켜들었다. 그때, 환이도 나와 똑같은 포즈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코에 송골송골 수증기가 맺혀져 있었다. 환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적막과 고요를 어느 정도 불식시켜 주었다.
“너… 미국에 안 간 거야?”
“응. 가려다가 말았어요.”
환이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유상현을 닮은 그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음, 그냥요. 유상현을 이해하려고는 하는데 잘 안 되고, 사실 누나에 대한 미련도 남고… 내 엄마가 누구인지도 궁금하고. 그런 모든 걸 남기고서 도망치듯 가기는 싫었어요. 뭐, 딱히 영어를 잘하는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하하.”
말을 마치고 멋쩍은 듯이 웃던 환이는 다시 머그잔을 들고 코코아를 마셨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는 환이 미국으로 떠나지 않은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사실 누나에 대한 미련도 남고’라는 대목이 자동적으로 반복되었다.
“난 그냥 너랑 나랑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니까… 니가 한 말들,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미안해.”
“나이 차요?”
코코아를 홀짝대던 환이가 갑작스레 발끈하며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표정에서 장난기를 송두리째 제거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여덟 살 차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많다는 거야.”
“누나랑 유상현도 여덟 살, 누나랑 나랑도 여덟 살 차이인데 왜 유상현은 되고 나는 안 되는데요?”
그래. 환이의 말이 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유상현과는 위로 여덟 살 차이, 환이와는 아래로 여덟 살 차이. 하지만 어째서 환이와의 나이차가 곱절은 더 많게 느껴지는 걸까?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 좌우로 저었다를 바보처럼 반복했다.
“그냥요!”
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긴장한 난 꿀꺽 침을 삼켰다.
“차라리 나이차가 아니라 유상현이 남자로써 훨씬 더 매력이 있었다고 해요.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쨌거나 그 인간은 나보다 십육 년이나 더 오래 살았고, 그 시간 동안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법 같은 걸 터득했을 테니까. 근데요! 누나.”
한층 목소리가 차분해진 환이가 나를 불렀고,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던 난 목소리 대신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마, 후회할 거예요. 몇 년 만 지나면 내가 유상현보다 만 배는 더 멋진 남자가 돼 있을 테니까.”
라고 말하며 피식 웃는 환이의 얼굴에서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이 조금은 해방된 듯 편해짐을 느꼈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환이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는 혼자 아파하고 고민하면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 마음이 좋지 못할까 봐 저렇듯 억지로나마 웃어주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은데 쉽사리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쥐고 있던 머그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리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해요… 누나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 여자 아들인 거?”
“…아니, …응. 아마도 너보다는 먼저 알고 있었을 거야.”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환이의 표정은 의외로 덤덤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머리를 긁적거리고서는 몇 번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씁쓸히 피식, 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쩐지 내 외모가 남다르긴 했어.”
그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를 보며 환이는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난 그런 환이에게 더 이상 숨기는 것 없이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히 말해주었다. 환이는 가끔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고, 놀란 표정을 짓기도 하며 내 이야기를 끝까지 성의 있게 들어주었다. 특히나 지은서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자기 엄마에 대한 호기심과 작은 것 하나라도 허투루 듣지 않으려고 하는 진지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유상현은 아직 연락이 없는 거야?”
“응. 그는 내가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쩜 맞는 말일 수도 있고.”
“그 변태지, 강윤지란 사람들도 전화는 안 받고?”
“응.”
“강윤지와 변태지가 거래한 무언가가 있겠네. 하지만 그걸 안다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잖아요.”
환의 직설적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끊임없이 부르르 떠는 핸드폰에서는 계속 낮선 번호들만이 떴다. 계속해서 수신되는 문자들도 ‘이현 씨, 인터뷰 부탁드려요’, ‘야! 이 기사들 다 진짜야?’라는 종류의 내용뿐이었다. 다시 한 번 유상현과 변태지, 강윤지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세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기, 혹시 지은서가 이 일에 가담한 건 아닐까?”
환이 명탐정 코난을 연상케 하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
“뭐?”
“그럴지도 모르죠. 도박을 건 건지도 몰라요.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에 대한 관심, 유상현, 그리고 나를 가질 수 있는 방법. 나 몰라라 했던 새로운 인생을 사는 방법. 그래요.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한 거네요.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아. 기사 내용들을 보면 모조리 지은서가 불쌍하다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어. 아무리 강윤지가 이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기자라고 해도 이 정도의 언론 플레이가 가능하려면 지은서가 필수불가결해요.”
문득, 다이애나가 말했던 “카드가 아니라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해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약 정말 이 사건에 지은서가 가담되어 있다면 정말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과정이나 결과가 어찌 됐든 간에 그녀는 대단한 용기를 낸 거다. 뜬금없이, ‘내가 살아가며 한 번쯤 그런 용기를 낸 적이 있었나. 내 인생을 걸고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위해 나를 건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의 왕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거나, 유상현의 차를 박은 것이나, 하는 것들은 단지 순간을 위한 단순한 객기였다.
나는 지금껏 나를 건, 내 인생을 송두리째 건 용기를 낸 모험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살면서 그런 순간이 몇 번이나 올까. 아니, 온다 해도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또 아니, 그런 순간이 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누나는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환아.”
“지은서가 이제 와서 뭘 하고 싶다고 해도 순순히 들어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 누나가 유상현이랑 잘 되게 밀어줄 생각도 없고. …그러니까 누나는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말을 마친 환이는 약간의 서글픔이 묻어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이미 식은 코코아를 원샷한 후 ‘캬!’ 하고 오버스럽게 소리를 냈다. 지금만큼은 그가 나보다 여덟 살 아래가 아닌, 여덟 살 위 오빠같이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