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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이애나, 그녀만의 비밀!’ 아니다. 하품에 옵션으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질 것 같은 식상한 제목이다.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아니, 이것도 패스.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패러디한 듯한 창의적이지 못한 제목이다. ‘다이애나, 스캔들의 여왕?’ 뭐, 그녀가 가는 곳곳마다 늘 스캔들이 터져 나왔고 가십거리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전 왕세자비에다 세계 패션을 주도하며 염문을 뿌리고 다닌 그녀는 언론의 먹잇감으로는 최고의 상대였다. 톰 행크스(소문에는 다이애나가 끈질기게 구애를 퍼부었으나 톰 행크스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고 한다), 음유시인 스팅*, 미 프로농구의 악동 로드먼, 파키스탄 의사 래스탯 칸, 등등. 뭐, 그녀와 염문설이 난 이들 중 다이애나가 인정한 사람은 래스탯 칸밖에 없지만.
* 레옹의 OST ‘Shape Of My Heart’의 작곡가로 유명한 스팅. 독특한 사운드와 실험 정신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고집과 열정을 버리지 않던 그는,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국제사면회(Amnedty International, 사상이나 신조 등에 의해 투옥된 자들의 석방 운동을 위해 1961년 설립된 조직)에 적극 관여했고, 이디오피아의 기아돕기운동에도 동참했다.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도 에릭 클랩튼, 다이어 스트레이트의 마크 노플러와 같은 슈퍼 록커와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 그 역시 훌륭한 셀러브리티다. |
하지만 이 제목 역시 성의 없는 제목이다. 게다가 늘 기재하던 기사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만큼은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 특히나 그녀는 내가 한 때 그토록 원했던 ‘신데렐라’의 삶을 살았다. 신데렐라와 다른 점을 꼽자면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를 찍었고 다이애나는 ‘파파라치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맞는’로 끝난다는 거다.
“야! 이현! 내 말 안 들려? 육수 끓는다니까. 그냥 다 넣는다.”
태이가 내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태이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전골냄비 안에 소쿠리 가득 담긴 어슷썰기한 파, 팽이버섯, 표고버섯, 배추, 쑥갓, 청경채 등등의 야채를 쏟아 부으며 “먹을 걸 앞에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라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미안, 미안.”
난 젓가락으로 전골 안에서 빠른 속도로 익어가는 야채들을 저으며 그녀에게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보냈다.
“뭐야, 유상현 생각한 거야? 야, 좀 말해줘 봐! 스타 유상현 말고, 인간 유상현에 대해서.”
태이가 목을 쑤욱 빼고선 의미심장한 웃음을 내뿜으며 물었다.
“야! 진짜 듣고 싶은 게 뭔데? 에두르지 말고 말해봐.”
“유상현의… 키스?”
“키스만?”
난 태이의 말을 빠르게 받아치며, “야채 다 익은 것 같은데 고기 넣어서 먹자. 맛있겠다” 라며 화제를 전환했다. 평소의 나라면 친구들에게 특히나 태이에게 애인과의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며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상현은 달랐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 유명인사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태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흘러가듯 유상현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게 부풀려져 기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유상현 연인의 친구 입에서 나온 확실한 정보’라는 기사머리로.
스타와 연애할 때 안 좋은 점 중 한 가지는 분명 ‘친구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꺄르르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음… 유상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난 ‘밥 먹을래요? 아님, 마실 것부터 줄까요?’를 물어봐. 그럼 유상현은 장난 섞인 눈빛을 보내며 ‘아니, 너부터’라고 말한다니까, 라는 말을 대체 어찌 남에게 한단 말인가. 절대 안 된다.
핏빛 선명한 종잇장처럼 얇은 고기들을 넣자마자 몇 번 휘휘 저은 후 건져내 입속에 넣어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태이가 갑작스레 무엇이 생각났는지 먹던 것을 꿀꺽 넘긴 후 “아, 맞다”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저께 ‘린’이라는 바에 미팅이 있어서 갔는데, 변태지랑 강윤…”
“강윤지?”
“아아, 응. 강윤지. 니가 만날 재수 없다던 그 기자가 강윤지 맞지?”
“응.”
“변태지, 강윤지. 그 둘이 있는 거 봤어. 둘이 원래 만나는 그런 사이야?”
하마터면, 놀라서 홀짝대던 맥주캔을 바닥으로 낙하시킬 뻔했다. 그저께면 편집장에게 기사 컨펌을 받던 날이다. 그날, 강윤지는 복도에서 누군가와 비밀스레 전화를 했다. ‘그럼 저녁에 봬요’라고 말하던 강윤지의 목소리와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니, 아예 안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니야.”
“그래? 아무튼 그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뭐, 그럼 인터뷰했나 보지.”
그렇담 별 거 아니네, 라는 표정과 말투로 말한 태이는 또다시 고기 몇 점을 전골 안에 집어넣었다. 따뜻한 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들어 변태지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음은 중간에 끊이지 않고 울렸지만 그의 목소리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두 번이나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왜 그래? 안 먹어? 샤브샤브용 최상급 고기 한 근 반, 5만5천 원. 야채까지 합하면 총 7만 원. 우린 지금 밖에서 먹음 10만 원이 훌쩍 넘는 저녁을 먹고 있다고.”
“응. 먹어, 먹어.”
난 젓가락으로 전골냄비 안을 성의 없이 뒤적였다. 이미 입맛이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여자의 직감이 연애 문제가 아니고도 적용되던가? 제발, 내가 염려하던 일이 아니길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전골냄비를 앞에 두고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내 불안에는 원천이 있다. 그날, 변태지와 와인을 마시던 그날. 내가 변태지에게 유상현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내 기억은 택시를 타고 온 후 유상현과 만났던 감격스런 장면을 빼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무척 심하게.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이마에 송골송골 방울이 맺혔다.
“아, 그리고 이건 극빈데. 지금 일본 쪽에서 지은서 사라졌다고 비상이래.”
“뭐?”
“업계 소문으로는 지은서가 일본 재벌 쪽이랑 결혼 이야기가 있었는데 무산됐나 봐. 이유는 모르겠고. 암튼 그 여자도 요즘 문제 많나 봐. 스타일리스트한테 하루에도 몇 번씩 일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짜증내나 봐. 근데, 그러려면 돈 많은 남자 잡아야 하잖아. 평소 생활하던 가다가 있는데 평범한 남자랑 평범하게 돈 쓰면서 살 수 있겠어? 근데 재벌가들과는 연애에서 결혼까지는 못 가나 봐. 뭐, 그게 슬픈 현실이지. 끼리끼리들 많이 노니까. 그리고 설사 그 재벌가에 들어간다 한들 몇 년 못 버티고 나올 게 분명하니까. 지은서도 요즘 힘들 거야.”
태이는 이 긴 말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전골 안을 돌아다니는 고기들을 열심히 찾아 헤맸다. 아마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시선을 두고 나를 바라봤다면,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해하는 내 표정을 봤다면 지은서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변태지인가 싶어 급하게 핸드폰을 들어보니 ‘나지고지순은개뿔’이라는 긴 글씨가 화면 위에서 깜박였다. 편집장이었다. 잡지 인쇄는 어제 넘어갔다. 그러니 원고 수정 이야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혹시, 다이애나 비 말고 다른 셀러브리티를 찾으라는 내용인가? 계속해서 입을 우물거리던 태이가 진동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날 슬쩍 보며 왜 받지 않느냐며 천진난만하게 고갯짓을 했다. 난 불안감을 그득 않은 채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네, 편집장님.”
떨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편집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