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유상현의 연락은 새벽 세시가 다 되어서야 왔다. 물론 나는 그 시간 동안 그의 연락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주인을 잃은 채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던 ‘다이애나 비’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3분의 2 이상 읽었다.
그녀의 삶은 정말이지, 드라마틱했다. 평범한 스펜서가의 딸로 태어난 다이애나는 열세 살이나 많은 찰스 왕세자의 눈에 띄어 결혼을 하게 된 전형적인 ‘신데렐라’형 여자였다. 어찌 보면 내가 그토록 소원하던 것을 이룬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을 했고, 여자로써 관련된 숱한 염문을 뿌렸으며 동시에, 세계 무대를 상대로 개인지뢰 금지, 자선사업 활동 등으로 왕궁과 대중매체를 뛰어넘어 국민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진정한 꽃을 피우려고 하던 찰나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 사건은 영국인들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신데렐라의 환상’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일본의 ‘미치코’ 천황비(이하 천황비)와 ‘마사코’ 왕세자비(이하 왕세세비)의 경우가 떠올랐다. 평민들과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간택된 천황비는 궁 내부라든지 천황가 내부에서의 심한 핍박을 받았으며, 반대했던 자들에게는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천황비)는 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궁 내부의 압력으로 인해 친가에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다이애나나 천황비를 우리나라로 치면 재벌가에 시집간 아름답지만 평범한 여인들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것은 재벌가와 이혼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 자리. 모든 행운을 거머쥐는 동시에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자리. 그녀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사소한 일이나 말 한마디에도 가십거리가 되기 쉽고 자유를 구속당하는, 왕실에 혹은 재력에 귀속된 ‘일반인’들은 진정 행복했을까? 이런 몽롱한 생각이 들면서 갑작기 다이애나 비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싶어졌다.
유상현 말대로 그녀도 ‘셀러브리티’다.
* * *
“다이애나 비?”
“네, 다이애나 비요. 영국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 비요.”
퇴근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각, ‘안젤리나 졸리 vs 제니퍼 애니스톤’ 기사 컨펌을 받기 위해 편집장에게 간 자리에서 다음 달 셀러브리티 특집 기사의 주인공을 ‘다이애나’로 하고 싶다고 넌지시 건넸다.
“왜? 벌써 쓸 만한 인물들이 다 떨어졌어? 섹스 심벌 마돈나, 약물 중독자로 자리매김했다가 이번에 재기하는 미샤 버튼, 상속녀 패리스 힐튼의 골 때리는 베스트프렌드 니콜 리치 등등 얘깃거리 풍부한 애들이 아직 많잖아? 그리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
편집장은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그런데 하필 재미없게 왜?’라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렇죠. 근데 ‘카드가 아니라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해요’란 말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나는 어제 유상현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래? 그 말뜻이 뭔데?”
그녀는 내가 건넨 A4용지 다섯 장으로 된 기사를 설렁설렁 눈으로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뭐, 그녀가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도 자기 신념도 찾아다녔다는 뜻 아닐까요?”
“말뜻은 좋네. 근데 그것만으로 자극적인 부분을 끄집어낼 수 있겠어? 예를 들어, 그래! 지금 이 기사처럼 브래드 같은 근사한 남자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셀러브리티들의 치열한 싸움. 근데, 정말 안젤리나 졸리가 제니퍼에게
‘내 남편에게 집적대지 말고 그만 사라져 줄래(back off)!’라는 경고 문자를 보냈어?”
“네.”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제 본 다이애나의 책 내용들이나 기사들을 떠올렸다.
“음… 다이애나 비도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잖아요.”
“그래. 뭐, 백 기자가 재미있게 쓸 수 있다면 써! 될 수 있는 한 자극적으로. 그래야 판매 부스를 조금이라도 올리지. 음, 이번 건 이대로 내보내도 되겠어. 오케이.”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페이퍼에서 시선을 나에게로 옮긴 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극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네’라는 긍정의 대답을 한 후 밖으로 나가려는데 편집장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자기. 유상현이랑은 잘돼가?”
블랙 계열의 차가운 뿔테 안에 가려진,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컨펌을 내기 위해 기사를 볼 때보다 더욱 반짝거렸다. 나는 ‘그러 것 같아요’라고 애매한 대답을 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난 커다란 하품을 했다. 눈가에 살짝 눈물까지 고였다. 그러고 보니, 새벽 세시에 온 유상현과 한참을 소소한 이야기와 사랑을 나누며 보낸 후, 그의 팔을 베고 잠이 든 시간이 새벽 대여섯시쯤 될 것이다. 서서히 동이 트며 불그스름한 기운이 세상에 힘을 뻗치는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수면을 취한 시간이 총 두 시간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차가운 물로 살짝 얼굴이라도 적셔 미친 듯이 일렁이는 수면욕을 잠재워볼까 하는 생각에 화장실로 향했다. 한 번에 한 장씩만! 이라고 표기해 놓은 종이 타월을 두 장 뽑아 들고 차가운 물을 흠뻑 적셔 이마와 볼에 차례대로 갖다 댔다.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 효과에 만족해하며 밖으로 나와 이왕 복도로 나온 김에 커피 한 잔을 뽑으려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그때, 복도 근처에서 ‘그게 정말이에요?’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살짝 옮겨보니 그곳에는 강윤지가 핸드폰을 든 채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다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그럼, 저녁에 봬요’라고 말한 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 이현 씨 커피 마시려구? 내가 한 잔 뽑아줄까?”
그녀가 부산스럽게, 하지만 다정스레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난 ‘괜찮아요. 전화 통화 내용 들은 거 없어요’라고 말한 후 그녀를 쓰윽 지나쳐갔다. 그녀는 방금 그 통화에서 꽤나 괜찮은 가십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 기사를 제공해준 그 누군가와 저녁에 만날 것이고, 행여나 내가 그 기삿거리에 대한 힌트가 될 만한 단어 하나라도 들었을까 봐 저리 놀란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아마도 그녀의 가십 기사는 또 우리 잡지의 최고 지면을 차지하며 가십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것이다.
그 가십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무슨 내용일지 살짝 궁금해졌지만, 며칠 후면 알게 될 거란 생각에 그냥 다이애나에 관한 기사거리를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지 고민하면서 인스턴트 커피를 후르륵거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