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세기 마지막 신데렐라,
파파라치의 희생자 다이애나 비!
* 다이애나 비(Spencer Diana, 1961.7.1~1997.8.31). 영국 찰스 왕세자의 빈이었으나 1996년 8월에 이혼했다. 이혼 후 대인지뢰 사용금지운동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이며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녔지만 1997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원인모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결혼에서부터 이혼, 사망하기까지 그녀는 황태자비 그 이상의 의미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다. 20세기 마지막 신데랄라, 하지만 파파라치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는 비운의 왕세자비! |
“카드가 아니라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해요….”
카펫 위에서 뒤집어 누워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오른손 검지를 톡톡거리며 인터넷 서핑을 하던 내 귀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 소파에 긴 다리를 뻗고 누워 책을 보고 있는 유상현의 모습은 마치 잡지 안의 화보를 연상케 했다. 카메라를 들어 찰칵찰칵 찍어대며 ‘좋아요. 딱 좋아요. 오케이!’를 외쳐야 될 만큼.
그가 언젠가부터 ‘집이 작아서인가? 편안해’라는, 어찌 보면 살짝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발언과 함께 자주 이 집에 드나들었지만 아직까지 그가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거나, 이렇듯 화보와 같은 포즈로 책을 본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여전히 날 설레게 했다.
“카드? 인생? 응?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다이애나 비가 한 말이야.”
“다이애나면 그 다이애나?”
“응. 그 다이애나.”
“의문의 사고로 죽은 영국 왕세자비?”
“그치. 파파라초의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려다 봉변을 당했지.”
“파파라초? 파파라치가 아니라?”
“아, 이탈리아어로 단수는 파파라초, 복수는 파파라치. 뭐든 상관없지만.”
툭툭 무심히 던져진 말들이 이상하게도 대화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다이애나 비가 파파라치에 의해 의문사를 당했던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지. 문득 불거져 나온 다이애나 비 이야기에, 검색창에 다이애나 비를 쳤다. 인물 정보를 포함해 주르륵 그녀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내렸다.
'왕가 사람. 1961년 7월 1일 출생. 1997년 8월 31일 사망. 가족 아들 윌리엄 윈저. 아들 해리 윈저.'
윌리엄 윈저? 윌리엄…. 맙소사! 머릿속에 어릴 적 내가 저질렀던 사건 하나가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각국의 왕자들에게 보낸 구애 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편지를 쓴 순서가 첫번째는 모나코 안드레아 왕자, 두번째가 윌리엄 왕자였을 것이다. 물론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파파리치들이 문제야. 근데, 누구는 뭐 찔리는 거 없나?”
유상현은 그 자세 그대로 겉표지에 ‘다이애나 비’라고 적혀 있는 책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을 건넸다.
“난….”
난 애당초 당신을 찍을 생각으로 주구장창 당신을 미행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내뱉으려다 다시 몸속으로 쑤욱, 밀어 넣었다. 만약 이 이야기를 깊게 파고든다면 그쪽! 환! 등등의 이야기가 거론될 게 분명했고, 내가 ‘그쪽’과 ‘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객기를 부려 유상현을 도발하고 속였다는 것이 탄로 날지도 모른다.
“뭐, 파파라치도 일종의 직업이잖아요.”
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 인간의 사생활을 모조리 빼앗아버리는데도?”
“사실, 유명인들 그러니까 셀러브리티들의 이름은 고유명사 취급받잖아요. 그만큼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사랑은 받으면서 내 모습들은 보여주기 싫다. 감추고 싶다. 그건 좀 아니잖아요.”
“그래서 넌, 파파라치 행위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멋대로 사진 찍고, 얼토당토않은 기사 쓰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나조차도 유상현과 연인 사이로 알려지면서 신문지면이나 인터넷 연예방송 등등에서 떠들어대는 사소한 나의 이야기들, 미니홈피의 자유가 침범당한 것이 불쾌하고 화가 났다. 또한 유상현의 집에서 나오면서 기자들의 거침없는 플래시 세례에 얼마나 당황했으며 짜증이 났던가. 그때 느낀, 내가 셀러브리티들에 대한 기사를 내 짐작으로 쓰고, 무방비한 상태인 채 찍힌 그들의 사진들을 올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들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유상현에게 그것을 인정하며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들을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는 못된 사람으로 치부시켜버리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내 입으로 말이다.
“공인도 사람이야. 사람이니까 실수도 해. 그래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생활이나 모습도 있기 마련이고. 근데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여기저기 올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당연히 상처받지 않겠어? 사람이니까….”
마지막에 그가 말한 ‘사람이니까’라는 대사가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다가와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 비는 파파라치 때문에 죽임도 당했고.”
“하지만… 다이애나 비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잖아요….”
나는, 기사 하나를 클릭해 조심스럽게 줄줄 읽어 내려갔다.
“사고 당시 함께 있었던 다이애나의 연인 도디의 부친 모하메드 알 파예드는 이 사고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과 영국 정보기관이 다이애나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해왔다. 사고 직후 다이애나비의 개인적인 편지들이 사라졌고, 사고 현장에서 목격된 흰색 피아트 차량의 운전사가 실종됐으며, 도디 운전사의 사고 전 세 시간 동안의 행적도 풀리지 않았다.”
난 말을 멈춘 후 조용히 듣고 있던 유상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살짝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모론은 어디든 존재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파파라치가 그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는 보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허리를 치켜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나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가, 가게요?”
“어. 저녁 약속 있어.”
그가 소파 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은 남색 카디건을 낚아채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어 현관 앞에 다다랐다. 그에게 뭐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먹먹하기만 했다. ‘사실, 나도 파파라치 행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차 박은 그날은 정말 미안했어요’라고? 하지만 막상 그 말들은 목 언저리만 술렁술렁 배회할 뿐이지 출산일을 앞두고도 좀처럼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 않는 태아처럼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손잡이를 잡았고 덜컹 소리가 나며, 현관문이 열렸다.
“저기, 그럼 나중에 전화….”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유상현이 동작을 멈춘 채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네가 한 달마다 쓰는 셀러브리티 특집 기사 있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이런 사람들도 다뤄보는 게 어때? 다이애나 비,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등등. 뭐, 좋은 사람들 많잖아? 이들도 셀러브리티 아닌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저녁에 전화할게’라는 말을 남긴 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난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무엇인가로 머리를 강타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상현이 말한 그녀들도 셀러브리티에 속했다.
'다이애나 비,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기사의 주인공으로 삼은 린제이 로한, 패리스 힐튼, 베컴. 그녀들도 셀러브리티지만 그녀들 말고도 다른 셀러브리티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