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대며 벽인지 자동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두둥 떠오르며 발걸음이 멈춰졌다.
‘빼앗기는 쪽이 나쁜 거야.’
지금쯤 그녀는 날 도발한 것에 대해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잔인한 얼굴로 회를 한 점 한 점 입에 넣으며 잘근잘근 씹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술을 한 잔 걸치면서 ‘지 까짓 게 감히 나랑 대적을 해?’라고 킥킥대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열린 문을 무시한 채, 몸을 홱 돌려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쿵쾅쿵쾅, 성난 내 발소리에 종종걸음으로 다소곳이 걸어다니는 종업원들이 한 번씩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양손으로 힘차게 미닫이문을 여니 지은서가 젓가락으로 회 한 점을 집고 있다가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반자동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간 거 아니었어? 놓고 간 거라도 있어?”
“아니요. 놓고 갈 게 있어서요.”
난 저벅저벅 걸어 내가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테이블이 들썩 거렸다. 매실주가 살짝 잔에서 흘러넘쳤고 난 재빠르게 그 잔을 들어 입속에 털어넣었다. 알싸한 맛이 온몸 전체에 퍼져나가며 알코올이 나의 용기를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뭔데요? 놓고 갈 게?”
그녀는 여전히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더 당당해졌다. 비웃음 섞인 웃음까지 내게 던져주었다. 마치 그녀의 눈빛은 니가 놓고 갈 게 있기라도 하냐는 듯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말했다.
“피자, 콜라, 사이다, 순대, 떡볶이.”
내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음식들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지은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 말을 무 자르듯 툭, 끊어버렸다.
“난 그런 거 안 먹는데? 피자는 칼로리 덩어리고 콜라랑 사이다는 치아 미백에 치명적이야. 순대, 떡볶이. 음…. 그런 것들도 별로. 자극적인 게 피부에 좋지 않다는 것 정돈 그쪽도 알죠?”
“…청국장.”
“하하. 그걸 먹으면 하루 종일 그 냄새가 몸에 배잖아. 이현 씨는 그런 음식들을 좋아하나 봐? 난 칼로리도 적고, 냄새도 안 배고, 건강에도 좋은 이런 음식들을 좋아해요. 이런 거?”
그녀가 도미 한 점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닌텐도 ‘위’ 같은 건 할 줄 알아요?”
“위? 게임? 난 승마를 좋아하는데?”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탱고 배우고 싶지 않아요?”
“탱고? 배우고 싶지 않았는데 배웠지. 근데 일 아니면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그녀가 물었고, 난 그녀의 대답에 허탈하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정말 유상현과 환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들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보다 말이다. 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있잖아요. 피자, 콜라, 떡볶이, 순대, 사이다는요, 환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이고요. ‘위’는 환이가 죽고 못 사는 게임기에요. 청국장은 유상현이 즐기는 음식이고요.”
줄곧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절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약간은 더 차가워졌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탱고 배우고 싶지 않아요? 지금이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무료로요. 어때요? 그건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대사고요. 유상현 씨는 그 대사를 외울 정도로 이 영활 사랑해요. 알아요?”
이제 그녀는 입조차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애써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가 이내 그것마저도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난 휴우 한숨을 토해냈다.
“당신은 그들에 대해 잘 몰라요. 지금 당신 눈앞에 앉아 있는 나. 보. 다. 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은서, 그녀가 살면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에게 수모를 안겨주기 위해 지금까지 환이와 유상현에 대한 얘기를 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들에 대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단지 자신이 다시 갖고 싶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놓고 가고 싶었던 건 이 말이에요. 그럼”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조용히, 하지만 무게감 있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쪽이 유상현이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모르죠.”
“뭔가 착각하나 본데, 유상현의 다이아 반지는 절대 니가 받을 수 없어.”
“그래요? 그럼 그깟 다이아반지 제가 받지 않고 주죠, 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밖으로 나와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한 발짝씩 떼어내며 차에 올라탔다. 엑셀을 밟고 일식집에서 100미터 정도 멀어져 간 후에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 최고의 ‘셀러브리티’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집에 도착해 멍하니 노트북을 껴안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누구나 사랑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브래드 피트를 유혹하기 위해 <프렌즈>에 출연할 당시 고단백 다이어트를 통해 9킬로그램이나 감량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취향을 고려해 갈색이었던 자신의 머리칼도 완전히 금발로 바꾸었다고 한다. 스팅의 뉴욕 콘서트 도중 무대 위에 올라가 브래드에게 <Fill her up>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깜짝쇼를 펼쳤고, 브래드를 위해 스트립쇼도 준비했다. 그 노력 끝에 브래드는 그녀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지만 안젤리나 졸리도 브래드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피트를 위해서 직접 식사 준비를 하고, 자신의 최고 무기인 섹시함을 최대한 이용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러브신을 촬영할 때 처음에는 모두 살색의 언더웨어를 입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졸리는 언더웨어를 벗고 과감히 알몸인 상태로 피트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눈 딱 감고 먹었으며, 신데렐라는 비싼 유리 구두를 담보로 왕자를 유혹했다. 라푼젤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다 뽑힐 위험을 무릅썼으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잠드는 동안 자신의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모험을 강행했다.
그래서 그녀들이 사랑을 쟁취한 것이다. 제니퍼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또다시 사랑을 빼앗길 수 있겠지만 그때 다시 한 번 사랑을 쟁취하면 되는 것이다. 안젤리나와 브래드는 아직 혼인신고를 한 것은 아니니까.
샤일로와 쌍둥이들까지 낳고도 안젤리나와의 혼인신고하기를 꺼리고 있는 브래드의 심중을 알 수는 없다. 또한 술에 취하면 제니퍼가 그립다고 하는 그 루머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도 없다. 그리고 그가 제니퍼에게 다시 돌아가는 핫이슈 거리가 생길지는 정말,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건, 나와 유상현과 지은서를 둘러싼 이 관계의 결말일지도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