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논현역 근처의 일식집이었다. 차가 정차하자 발렛 요원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눈이 마주치자 난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잠들어 있는 지은서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으음…,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인형처럼 기다란 속눈썹의 눈을 깜박이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다 왔어?”
“그런 거 같은데요?”
그녀가 앙증맞은 디올 클러치백 안에서 그 백과 도무지 매치되지 않는 빅 사이즈의 안나수이 나비 거울을 꺼낸 후 선글라스를 쓰고는 채 반도 보이지 않은 조막만한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면서 “나 안 이상하지?”라고 내게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덩달아 룸미러를 열어 내 얼굴을 진지하게 살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입구로 들어갔다. 럭셔리하게 대리석으로 꾸며진 길을 걷다보니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어리둥절해 두리번거리자 벽으로 착각했던 곳의 한 면이 자동으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남색 유카타 차림의 종업원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지은서는 그 종업원에게 지배인을 불러달라고 했고 곧,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지은서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고 우리를 식당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다섯 평 남짓의 개인 룸으로 안내했다.
“은서씨! 한국엔 언제 왔어요?”
지은서와 내가 마주보며 자리에 앉자마자 지배인도 양 무릎을 꿇은 채 다소곳이 앉아 지은서에게 물었다.
“방금요. 근데, 비밀이에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지배인을 향해 살짝 눈을 찡긋한 지은서는 비치되어 있던 물을 마시더니
“아, 항상 먹던 걸로 2인분이요.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지배인님이 직접 서빙 좀 해주세요”라고 말을
이었다.
“네. 그럼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말을 마친 지배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녀가 나가고 미닫이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정신도 번쩍 들었다. 적과의 동침, 아니 적과의 저녁 식사가 시작된 것이다. 일단 제일 먼저 뇌리에 스친 불쾌함은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지은서가 항상 먹던 것! 이라는 메뉴를 주문했다는 것이다. 그 메뉴가 상어회인지, 돌고래 회인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뭐…, 그래도 먹긴 하겠다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새우, 전복, 소라, 은행, 마 샐러드, 매실주 등등 식전 음식들이 아기자기한 그릇에 소담스럽게 담겨나왔다. 신선해 보이는 해물을 뒤로 하고 지은서가 매실주로 입안을 살짝 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시지도 않았는데 시큼하며 달짝지근한 매실의 향내가 입안 가득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절로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갔다. 나도 손을 뻗어 매실주를 집었다.
“어떻게 꼬셨어요?”
“네?”
“상현 씨! 어떻게 꼬셨냐고요.”
‘어떻게 만났어요’, ‘어떻게 시작했어요’가 아닌 ‘어떻게 꼬셨어요?’라니. 그 황당한 질문에 입안에 넣은 매실 향이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렸다.
“전, 꼬신 적 없는데요?”
“그럼 상현 씨가 꼬셨나? 그 남자 여자한테 먼저 다가가는 스타일 아닌데!”
물론 유상현이 먼저 나에게 다가온 건 아니다. 내가 그의 차를 박았으니 어찌 보면 표면적으론 내가 접근 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찌됐건. 당신이 유상현과 내 관계를 안다는 건 들었어요. 환이에 대해서도.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지은서의 눈동자 크기만 한 동그란 은행 알이 지은서의 입으로 쏘옥 들어갔다.
“전….”
“난 다시 상현 씨와 시작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방해돼!”
지은서는 입에 넣은 은행알을 오물오물 씹었다.
“…네?”
“그래서 난 당신이 사라져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대했다. 난 물러서지 않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유상현이 나를 택했으니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성난 파도처럼 세차게 일렁이는 마음에 매실주가 든 잔을 바닥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후 ‘내가 물건이냐? 사라지게!’, ‘이제 와서 왜 그러냐! 난 그럴 맘이 없다. 너나 사라지세요’ 등등 머릿속에 윙윙대는 말들을 쏟아내려 하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지배인이 들어왔다.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배 모양의 그릇에 갖가지 회들이 무리 지어 맛깔스럽게 놓여 있었고 배 앞머리에는 도미로 추정되는 생선 머리가 큰 눈을 뜬 채 자리하고 있었다. 지배인이 다시 나간 후, 지은서가 간장종지에 와사비를 풀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 생각했던 말들을 약간 정리를 하며 조리 있게 내 의견을 말하려는데 지은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요. 다 버릴 각오로 왔어요.”
“다 버릴 각오요?”
“응.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를 버릴 각오. 여배우에게 이 정도의 스캔들은 굉장한 타격이잖아요. 근데 난 괜찮아요. 유상현과 환이를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왜 다시 얻고 싶은 건데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말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세월 동안 내 아들이 많이 컸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미 다 지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버렸어요. 이제 와서 그럴 권리가….”
“권리 따위가 무슨 상관이죠? 내가 가지고 싶으면 갖는 거지.”
그녀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고, 그녀의 당당함에 난 말문을 잃었다.
“난 지금껏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면서 살아왔어요. 지금 나 지은서는 유상현과 환이가 갖고 싶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지은서의 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두 사람이 무슨 물건이에요? 가지고 싶으면 갖고 필요 없음 버리게?”
내 격앙된 목소리가 빳빳한 긴장감으로 둔갑해 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지은서는 예상 밖의 내 반응에 잠시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후 회 한 점을 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몇 번의 우물우물거림 끝에 회는 그녀의 몸 안으로 넘어갔다. 그녀가 만족한 듯 입맛을 다시더니 물로 목을 축이곤 유유히 말을 시작했다.
“난 물건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 해도 그게 뭐가 나빠요? 원래 사람은 갖고 싶은 건 원하고 필요 없는 건 버리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당신도 혹시 ‘난 착해서 그런 거 안 해요’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종인가? 그런 여자들 정말 싫어. 난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어요. 내가 갖고 싶은 건 다 갖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상대도 날 필요로 하게 만들면서요. 그럼 나쁜 거 없잖아요? 바보처럼 못 가진 자들이 그런 이야길 하는 거예요. 나도 못 가지니 억지로라도 갖는 당신들이 나쁜 거다. 근데, 난 못 가지고 불평하는 자들이 더 한심해 보이는 걸요? 인간의 도리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사실, 안젤리나 졸리가 브래드 피트 가진 것도 어찌 보면 이기적이죠. 하지만 너무 당당하니까 누구도 반기를 못 들잖아요. 난 그런 여자들이 좋더라. 뺏긴 쪽이 잘못이야.”
그렇게 청산유수처럼 흘러내린 말이 일리 없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도 없었다. 확실한 건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당당하며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뺏기는 자가 잘못이라고? 그렇다면 난 이 여자에게 절대 그 남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전투심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렇다면! 빼앗아보세요. 난 절대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한 후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저벅저벅 성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음식을 든 지배인이 나를 발견하곤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요”라고 상냥하게 말했지만 난 대꾸 없이 계속해서 걸음을 걸었다. 물론, 지은서는 나를 부르거나 쫒아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유상현이 아닌, 환이가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은서처럼 아름다움도, 고상함도, 여왕 같은 포스도 존재하지 않지만 날 우리 공주님이라고 불러줬으며, 어릴 적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줄 만큼 다정했고, 그녀의 품은 어떤 푹신한 소파보다 아늑했다.
여왕을 엄마로 둔 공주나 왕자들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