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몽롱한 상태에서 익숙지 않은 핸드폰 벨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말았다’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반쯤 뜨고 달갑지 않은 소음의 위치를 찾아보려 손을 쭉 뻗다가,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누군가가 아직은 흐릿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에 짙고 긴 속눈썹,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 순간 어젯밤 있었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고, 그러자 반사적으로 씨익,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뻗던 손 방향을 살짝 틀어 유상현 얼굴 앞에서 흔들어봤다. 꽤나 피곤했는지 그는 자신의 얼굴 앞에서 손이 붕붕 왔다갔다 거리는 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꿈틀, 몸을 뒤집어 턱을 괘고 누워 한참 동안 유상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은 분명 이 남자에게 특별한 사랑을 느끼고는 편애하셨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완벽한 외모를 하사하실 리가 없지 않은가. 브리짓 존스에서 브리짓이 아침마다 마크 다아시의 얼굴을 물끄러미, 한없이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그 장면이 드디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불공평한 세상이라 생각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완벽한 자가 완벽하지 않은 자에게 완벽을 나눠주면 되는 것 아닌가? 어제 유상현이 말한 대로 말이다. 다시 한 번 풋, 하고 쑥스러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때, 잠시 멈췄던 벨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눈을 뜰 타이밍을 영, 찾을 수가 없잖아.”
라며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든 유상현이 ‘쉿’이라며 나에게 조용하라는 주의를 줬다.
“어! 왜? 나 집 아니야.”
유상현의 매니저인 모양이었다.
“올 필요 없어. 샵으로 바로 갈 거야.”
그렇게 말하고 핸드폰을 끊은 유상현은 한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쓰윽쓰윽 문질렀다. 그 바람에 내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버렸다.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이 재미난지 유상현은 몇 번이나 그 행동을 반복했고 내가 짜증을 내자 참아왔던 웃음을 푸핫, 터뜨리더니 슬며시 내게 다가와 내 입술을 막아버렸다. 자신의 차로 바래다준다는 유상현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한 나는 내 차에 올라탔다. 지은서를 데리러 택시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감이 오늘인 기사 몇 개를 정리하는 도중 몇 번이나 시계를 쳐다봤는지 모르겠다. 타이트한 핏을 자랑하는 44 사이즈의 블루 스키니 진에 타이트한 셔츠를 착용한 나는 쭉 삐져나오는 흉측한 허리 살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점심을 크림이 추가되지 않은 커피 한 잔으로 때우는 고생을 감행했다. 방금 윤대리가 “벌써부터 붕어빵이 나오는 거 있지?”라고 호들갑을 떨며 양손 가득 들고 온 붕어빵도 애써 모른 척했다. 왜 44 사이즈 스키니 진이라 하는가? ‘죽을 사’자의 고비를 두 번 넘기는 다이어트를 해야만 입을 수 있는 바지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분명.
드디어 시계가 네시 반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인천국제공항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운항 스케줄표를 조회해본 결과 지은서가 탄 비행기는 연착 없이 정확히 다섯시에 도착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다섯시 도착 비행기라. 지은서라면 분명 퍼스트 석을 탔을 것이고, 그렇다면! 빠른 입국심사와 짐 찾기 등등을 마친다 해도 십오 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출발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카메라를 부산스럽게 어깨에 들러 메고, 옆에서 붕어빵을 우적거리고 있는 윤 기자에게 “저, 취재 하러 가요”라고 슬쩍, 말했다. 그 말에 강윤지가 힐끔 나를 쳐다봤지만 난 애써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또각또각, 9센티미터나 되는 구두 굽이 내는 소리가 사무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올림픽 대로를 타다 인천공항으로 가던 도중 차가 잠시라도 멈춰 설 때마다 룸미러를 통해 거울로 내 얼굴의 상태를 확인했다. 불행히, 인천공항 전용고속도로에 들어서고부터는 시속 100킬로미터를 유지하는 속도로 곧장 달렸기 때문에 룸미러를 볼 새가 없었다. 세월아 네월아 달리는 차들을 추월하기 위해 차선을 바꾸며 속도를 올릴 때마다 긴장감도 같은 비율로 올라갔다. 인터체인지에서 전용고속도로 금액을 지불한 후 덜컹거리는 왼쪽 차선 위를 달리다보니 곧, 인천공항 안으로 내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승용차ㆍ택시용 진입 차선을 반드시 지켜서 진입하여야 한다는 도로안내 표지판에 따라 가다가 승용차 단기 주차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나오자 그곳으로 따라 쭈욱 올라갔다. 공항 입구 여기저기 픽업 나온 차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JAL 항공이 표기되어 있는 위치를 찾아 기어가듯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JAL 항공’이 표기되어 있는 곳에 마침 하얀색 벤 하나가 누군가의 짐을 싣더니 스르륵 빠져나갔고 난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재빠르게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십오분이었다. 이제 곧 도착하겠구나 싶어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폴더를 여니 부재중 세 통이 성을 내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순간,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고 난 반사적으로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열자마자,
“어디예요?”
라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지은서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 기류가 내 몸 전체를 휩싸고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 된다. 절.대.
“네? 여기 공항인데요?”
“몇 번 게이트?”
“여기가….”
고개를 돌려 보니 C 게이트라고 쓰여 있었다.
“C 게이트요.”
“무슨 차?”
“노란색 폭스바겐인데요? 벌써 도착했어요?”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끊겨졌고 곧, 누군가 조수석 문을 세차게 열었다. 블랙 보잉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짐 가방이라고 하기도 뭐한 자그마한 빨간색 트렁크를 든 채 서 있었다. 선뜻 차에 올라탄 그녀가 그 가방을 뒷좌석에 던지다시피 놔둔 채 내 쪽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고 나는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녀가 한 십 초간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하얀 손가락을 이용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곤 활짝 웃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상현과 환이의 미소를 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두근거림. 방어하려고 단단히 쳐 놓은 바리케이드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무.장.해.제.
“실물이 훨씬 더… 이쁘잖…아!”
결코, 소리를 내면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저절로 말이 새어나왔다. 지은서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더니 선글라스를 벗던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지은서예요.”
나는 미묘하게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킨 후 뻣뻣하게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덥석 내 손을 잡곤 반가운 듯 흔들었다. 난 내 손의 작은 떨림이 그녀에게 제발 전달되지 않길 바라며 말했다.
“백… 이현이에요.”
“생각보다 예쁘네요? 하긴….”
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지은서가 갑자기 뭐라도 생각난 듯 무릎을 치며 기분 나쁜 듯 재잘거렸다.
“대부분 여자들은 자신이 화면발 사진발이 잘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거 완전 착각이라니까? 화면발 사진발은 한순간에 포착되는 거잖아! 딱 세워놓고 수백 명의 기자들이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사진 찍어봐. 그중 잘 나온 사진이 몇 장이나 될지? 그리고 ENG 카메라 들이대봐. 완전 엉망일 걸? 그래서 여자 연예인들이 괴로운 거야. 항상 방심하면 안 되거든! 아, 요즘엔 티비 화질 수준이 높아진 만큼 여배우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진다니까! 뾰루지 하나만 발견되도 관리가 엉망이니, 이제 망가지기 시작하느니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난리지. 아, 출발 안 해요? 여기 오 분 이상 정차하면 경찰 와요.”
그녀의 일방적인 수다에 잠시 정신을 놓았던 난 ‘아…, 아’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엑셀을 밟고 핸들을 급하게 왼쪽으로 꺾었다. 내가 빠져나온 자리는 금세 또 다른 차가 차지해버렸다. 오던 길을 돌아 인터체인지에 도착해 통행료를 내려는데, 지은서가 자신의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를 내밀었다.
“오던 길 통행료와 기름값은 근사한 식사로 대신할게요. 뭐 좋아해요?”
정말, 줏대 없이 ‘아무거나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평소 그토록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음식들이 왜 하필 지금 이때 떠오르지 않는 건지. 이왕이면 값비싼! 것으로 대답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일식 좋아해요?”
아! 일식. 결국, 난 줏.대.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은서가 제멋대로 나의 네비게이션을 키더니 손가락으로 꾹꾹 터치가 가능한 화면을 눌러댔다. 그러자 곧,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를 시작하겠다는 멘트를 흘려보냈다.
“여기 좋아요. 아직은 덜 막히니까 사오십 분 걸리려나? 나 잠깐 눈 좀 붙일게요. 그래도 되죠?”
지은서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조수석 의자를 훽 뒤로 재끼더니 무릎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했다. 난 차마 ‘안 돼!’, ‘싫어!’, ‘왜 나는 운전하고 너는 자는데!’ 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계속되는 도로를 달렸다. 신호등이라도 있으면 순간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아 지금 내 옆에서 잠이 든 얄미운 그녀의 단잠을 무참히 깨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도로는 올림픽대로에 합류해 일반 도로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정지해야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억울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애꿎은 액셀만 꾸욱, 꾸욱 짓밟아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