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가격을 자랑할 듯한 블랙 슈트를 차려 입은 근사한 ‘유상현’을 너저분한 우리 집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다. 절.대. 더욱 중요한 건, 어울리지 않게 이별의 대사를 읊조린 후라는 거다! 그 장소가 차 안이라면 세상 무너질 듯 슬픈 표정을 짓고선 힘없이 추욱 늘어진 어깨를 비틀거리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유유히 바람처럼 사라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의 집! 안에서는 결코 내가 사라질 수 없다. 오직 그가 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서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면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덜컥’ 무너질 게 분명하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건, 게다가 한때나마 마음에 품었던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건 그다지 경험하고픈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상현은 막무가내였다.
“지금 네 상태를 보아하니 차에 타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너, 내 차 시트가 얼마나 비싼지는 알지?”
“그럼 제 차에 탈까요?”
“…아니. 니 차는 좁아. 답답해.”
라고, 찡그린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말하더니 무엇이 떠오른 듯 굉장히 기분 나쁘고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 치사한 거 아냐? 너도 우리 집에 왔잖아. 내가 와인도 주고 커피도 주고. 벌써 다 까먹었어? 게다가… 환이는 그 집에 살다시피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라고 말하며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찔한 술기운 때문에 그를 막을 여력이 더 이상은 없었다. 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그를 앞질러 걸었고 우린 곧,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의 술 냄새와 유상현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별다른 대화 없이 도착한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문을 열다 환이의 문자가 떠올랐다. 우유 통에 슬쩍 오른손을 넣어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문득, 환이가 떠올랐다. 난 열쇠를 집어들지 않은 채 손을 빼냈다.
그의 신발장보다 약 삼 분의 일 정도 작은 내 신발장에 그의 블랙 에나멜 슈즈가 놓여졌다. 집 안으로 들어온 유상현은 겉옷을 벗어 소파에 올려놓은 후 화이트 셔츠에 장식되다시피 한 나비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렀다.
“불편해 죽는 줄 알았네. 암튼 시상식은 수상이나 시상이나 피곤해! 아, 나 여기에 앉아도 되나?”
유상현이 어울리지 않게 소파를 가리키며 나에게 허락을 구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넥타이를 끄르는 데 성공한 유상현은 고개를 돌려 거실 안을 쓰윽 훑어보았다.
“두 시간 내내 계속되는 시상식에 어떻게 웃고만 있어? 근데 잠시라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금세 인터넷에 오른다니까. 성의가 없네, 자기 상 받을 때 아니라고 무심하네 싸가지가 없네, 등등.”
주절거리듯 내뱉는 그 말을 듣자,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작년, 연말 시상식이 한창일 때 난 베스트 드레서, 워스트 드레서 대신 베스트 자세, 워스트 자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일부러 배우들이 지칠 때 쯤 몸을 꿈틀거린다거나, 하품을 한다거나, 멍 때리고 있는 이런 저런 장면을 삽입한 채. 기사 내용도 방금 유상현이 말한 대사 그대로였다.
“커피요? 아님, 콜라?”
난 재빠르게 주제를 바꿨다. 마침 환이가 남기고 간 콜라가 냉장고 안에 있었다. 김이 빠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필요 없어.”
라고 말하며 팔을 휙 뻗은 유상현은 가까이 있던 내 오른손을 덥석 잡은 후 힘 있게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술기운에 힘이 없던 나는 맥없이 유상현의 옆자리에 풀썩 쓰러지듯 앉았다.
“왜 전화 안 받는데?”
“전화요? …몰랐어요.”
“거짓말.”
“그나저나, 환이랑은 이야기 잘 끝났어요?”
“일찍도 물어본다. 말해줘?”
난 그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환이 문제는 기도에 걸려버린 가시처럼 찝찝했다.
“그럼, 내 대답은 좀 있다 듣지.”
라고 유상현이 말을 시작했다. 그날 환이는 유상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고 했다. 혼란스러우니, 이해를 할 수 있고 납득할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그리고 환이가 진심으로 이현 누나, 그러니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도 물었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난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그래서요? 뭐라고 대답했어요?”
애써 침착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뭘 뭐라고 대답해? 지금 우리가 진짜 연인 사이인 건 맞잖아. 마음에도 없는 상대랑 사귀지는 않으니까.”
“그래서요? 환이는 뭐래요?”
“별 말 않던데? 재미있는 여자라고. 그 말만 했어.”
갑작스레 휴우, 한숨이 내쉬어졌다. 환이가 유상현에게 자신과 있었던 거래 등등은 이야기하지 않았나 보다. 환이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환이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오늘 아침에 엄마랑 이모가 있는 미국에 갔어. 개학하기 전에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아… 그럼 지은서 이야기는요?”
“못 했어. 그런 와중에 환이에게 차마 지은서의 이야기까지는 꺼낼 수가 없었어. 은서한테 기다려 달라고 말해야지. 근데 너는 무슨 일인데?”
유상현이 허리를 돌려 진지한 눈빛을 하고는 물었다.
“왜 그날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더니 연락 두절이 된 거냐고?”
나는 약간의 미소를 지은 후 마음을 다잡았다. 환이와의 관계도 정리되었다면 이제 나만 이들과 정리하면 된다. 그는 원래 셀러브리티의 자리로 난 셀러브리티를 기사로 쓰는 기자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나에게 어울리는 왕자님을 찾을 것이다.
유상현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아깝고 아깝지 않고의 차이를 떠나서 이제 막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닥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더 좋아하기 전에, 더 진심으로 돌아서기 전에 이쯤에서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놓는 게 나중에 덜 아플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이제 그만해요.”
툭 내뱉은 그 말에 유상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셀러브리티 역할 놀이 재미없어졌어요. 그게 생각보다 좋은 것도 아니더라고요. 이 사람, 저사람 다들 날 귀찮게 하지, 내 미니홈피 다이어리엔 욕만 써놓지. 글쎄!”
난 애써 담담한 척, 밝은 척에 제스처까지 해가며 조잘거렸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유상현은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는 어떤 초딩이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서는 막 얼굴도 못 생긴 게 꺼지라고, 유상현은 절대 너 같은 얼굴의 소유자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근데 그렇게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더라고요. 뭐, 내가 딱히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당신은… 나보다는 지은서 같은….”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내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느닷없는 키스에 당황한 난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어내고 놀란 두 눈을 껌벅껌벅거리며 유상현을 바라보자 그가 설명하기 귀찮은 듯, 살짝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그거 알아? 원래 왕자들이 마지막에 고른 공주들은 그렇게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완벽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왜냐면 왕자들은 그런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만나 봤거든. 재미없어. 완벽함은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으니까.”
어쩜 저렇게 재수 없는 멘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거지? 하지만 더 이상한 건 그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유상현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두어 번 머리를 긁적이며 날 설득시키는 투로 나지막하게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는 완벽에서 살짝 모자라도 상관없어. 까짓 거 내가 다 채워주면 되거든.”
심장이 두근거렸고, 술기운 탓인지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유상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기가 해놓고도 겸연쩍은지 살짝 부끄러워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마음에, 말에 거짓은 없다고, 믿어도 좋다고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문득, 내가 어릴 적 공주들을 분석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주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 우아함, 지혜로움, 고상함 등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 살짝 모자란 모습―가시에 찔리질 않나, 패션의 필수 아이템인 구두를 흘리고 다니질 않나, 남이 주는 사과를 덥석 받아 깎.지.도 않은 채 함부로 먹질 않나―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곧잘 위험에 빠졌지만 진실한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고 믿어서 그 믿음의 힘으로 늘 악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왕자님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곤 했다.’
아름다움, 우아함, 지혜로움, 고상함 등을 골고루 갖춘 것은 잘 모르겠으나 살짝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것과, 특히 ‘구두를 흘리고 다니질 않나’라는 대목을 보자면—난 분명 유상현과의 첫 만남에 구두 한 짝을 잃어버려 맨발이었다—나는 다분히 그녀들과 닮아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 뒤 문장이다. ‘진실한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고 믿어서 그 믿음의 힘으로 늘 악의 무리—그럼 악은 지은서인가?—를 물리친다는 것.’ 그래서 왕자님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곤 했다는 것!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고, 덜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 지 모자란 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과 사람을 믿는 거란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그리고 상처받을지 몰라도 한 번은 밀고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그렇게 해서 제니퍼에게 그 멋진 남자 브래드 피트를 빼앗았다. 세기가 인정하고 헐리우드가 공인한 제니퍼와 브래드 피트 커플 사이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브래드 피트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끝내 그를 가졌다. 언론들이며 수많은 팬들이 이러한 졸리의 행동에 들고 일어났지만 졸리와 피트는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순간, 지은서와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졸리처럼 대담하고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없었지만, 지금 이 사람만 곁에 있어준다면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고민 고민하다 끝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한마디로 사르르, 허탈하게 사라져버리는.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난 허탈한 마음에 흘러나오는 웃음인지, 안도와 행복함에 나오는 울음인지 모를 감정을 억누른 채,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여전히 가슴 한켠에 알 수 없는 딱딱한 웅어리로 남아 있는 환이가 있었지만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