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말을 하려다 멈춘 태지는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혼자 ‘아니지, 아니야. 말도 안 돼’라며 반쯤 채워진 와인을 마치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난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선 태지에게 물어봤다.
“뭔데?”
“아니야. 그냥 정말 헛소리야.”
“그러니까, 그 헛소리란 게 뭔데?”
난 아예 의자를 끌어당겨 태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대답을 재촉했다. 태지는 약간 인상을 쓰더니 이리저리 눈썹을 씰룩씰룩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 나오는 그만의 특유한 습관이다. 물론, 커밍아웃을 고백하던 날도 이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린데! 뭐, 그러니까 말해도 되겠지?”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과하게 했다. 결국 태지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더니 ‘에라 모르겠다’와 비장함이 골고루 섞인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지은서가….”
“지은서가?”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기도로 넘어갔다.
“글쎄… 숨겨둔 애가 있대!”
“뭐?”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태지가 재빠르게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내 입에 가져다 대더니 “쉿” 하고 주의를 줬다.
“응응. 미안, 미안.”
난 혼돈스런 머리를 재빠르게 정리하려고 애쓰며 나를 바라보는 태지를 향해 일부러 말도 안 돼, 라는 뜻의 웃음을 피식 흘렸다. 그리고 손을 공중에 휘휘 지으며 오버스럽게 어이없다는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천하의 지은서한테 애가? 에이, 장난해? 누가 그래?”
“그지? 말도 안 되지? 근데! 내 친구, 그러니까 지은서 스타일리스트 보.조.가 지은서가 누군가랑 통화하는 이야길 몰래 엿들었나 봐. 이제 지긋지긋한 연예계를 떠나 그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고 싶다나 뭐라나.”
“…엄마? 평범한 여자?”
그 지은서란 여자가 정말 환이의 엄마로, 유상현의 아내로 살고 싶은 건가? 그래서 날 만나고 싶은 건가? 장해물 제거를 목적으로?
“하하하. ‘엄마’, ‘평범한 여자’는 지은서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지! 내 생각엔 새로 들어갈 영화 대본 연습한 게 아닐까 싶어.”
자신의 말에 스스로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태지가 카망베르 치즈 한 조각을 낼름 입에 넣고 우물우물 거렸다.
“그지? 그런 거겠지. 하하, 지은서한테 애가 있을 리가. 절대 없지! 어디 그 몸이 애를 난 몸이야?”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나도 치즈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으며 털털하게 웃어댔다. 치즈 겉면의 텁텁한 맛, 그 안의 짭조름하면서도 시금털털한 맛이 지금 내 기분에 딱 어울렸다.
“근데, 지은서 요즘 좀 슬럼프긴 한가 봐. 하긴, 이제 나이가 서른넷이니 뭐. 주연이 들어와도 미혼모나 이혼녀, 골드미스 역할로 들어오니까. 한때 죽을 만큼 반짝이던 것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면 약간 측은하기도 해.”
태지가 먼 산을 바라보듯 공허한 눈빛을 하곤 말했다.
“야! 뭐가 측은해? 그런 경험을 해본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그런 빛나는 사람들의 들러리만 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도 수두룩하거든!”
난 어쩐지 지은서를 두둔하는 듯한 태지의 발언에 발끈해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그것도 그렇지만…. 예전에 이현이 니가 사극 보면서 ‘저 시절엔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말한 적 있잖아. TV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샤워실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없고, 초콜릿도 없고. 근데 생각해보면 그땐 그게 당연한 거고 익숙한 거더라고. 음…, 있다가 없으면 미치도록 불편하겠지만 아예 처음부터 없는 건 불편하지 않은 거야. 왜냐? 아예 그 편의와 맛을 모르거든. 한마디로 그게 없어서 불편하다는 걸 못 느껴!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근데 지은서의 경우는 있던 것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거지.…뭐, 이런 거 아닐까?”
태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한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지은서가 불쌍하다는 거야?”
사실 태지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갔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절대 지은서의 편을 들어줄 순 없었다.
“에이…설마! 얼른 그런 날이 오면 좋겠는 걸? 내가 당한 만큼! 실컷 비웃어 줄 테닷!”
태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꺄르르 웃어대더니 금세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그 날이 멀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보톡스니, 마사지니, 태반주사니, 워낙에 미용 의학기술이 발달했잖아! 그녀는 약 오 년간 실세를 유지할 거야. 그리고 만약 그녀가 평범한 아내, 엄마가 되고 싶다면 그 또한 그녀 마음대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지은서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을까? 나 빼고!”
라고 말하던 태지가 금세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아, 난 남자에서 제외지!”
그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들어 내 잔과 부딪치더니 또다시 홀로 원샷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와인 두 병을 더 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우리 둘은 혀 꼬인 소리를 하염없이 내뱉으며 남들이 보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서로는 이해하는지 깔깔대며 시끄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더 이상 와인 잔을 들 수조차 없는 상황이 왔을 때! 나보다 살짝 주량이 약한 태지가 테이블 위로 피식, 고꾸라졌다.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쓰러진 태지를 택시에 태우고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조그마해지는 택시를 보고 있자니, 드문드문 떠올랐던! 태지와의 연인이란 이름의 추억마저 저 멀리 떠나가는 것처럼, 사그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커밍아웃’을 외치며 떠나갔던 얼토당토않은 일을 이제는 웃으며 되새길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정말 그와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허탈한 웃음이 지어질 정도였다. 바에 대기 중이던 대리운전기사가 내 차 운전석에 올라탔고, 난 뒷좌석에 퍼질러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취기 때문인지 불빛 가득한 밤 풍경은 하염없이 흔들거렸다.
지은서.
아마도 그녀는 모두의 사랑과 관심으로 살아가는 셀러브리티 역할에 싫증이 났나 보다. 그래서 그 좋은 옷을 벗어던지고 환이와 유상현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긴, 환이가 그녀의 아들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난 그들에게 정말 제 삼자, 관계자 ‘외’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버림받는 것 보단 버리는 게 낫다. 내가 태지에 대해 조금만 더 관찰을 하고 그와 나 사이의 그림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봤다만 난 태지에게 버려지지 않았을 거다. 내가 그를 냉정히 버렸을 거다.
유상현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웃나라 공주님의 왕자가 될 사람이다. 더군다나, 난 인어공주처럼 익사할 뻔한 그를 구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를 위기로 빠져들게 만했다.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 하늘 위로 두둥실 날아가 의미 없이 펑펑 터져 형체 없이 사라지기 전에 왕자를 떠나 내 마음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결심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만남보다는 전화 통화가, 전화 통화보다는 문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이별 통보’를 치사하고 비겁하다하는 사람이 다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하게 이별할 수 있는 ‘문자 이별 통보’야 말로 문명이 낳은 이기 중 하나다. 물론 내가 당한다면 치사하니, 비열하니, 겁쟁이니, 죽어 마땅하느니 등등 별별 욕지거리를 다 내뱉었겠지만.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다.
어쨌든, 결심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고 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신권 두 장을 꺼내 대리기사님에게 건넸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총총히 사라지는 대리기사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난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한참을 뒤적거려도 핸드폰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짜증이 난 나는 쪼그리고 앉아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가방이 갖가지 물건들을 와르르 토해냈다. 그중 핸드폰도 있었다. 핸드폰을 집어든 나는, 유상현의 번호를 찾은 메시지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말들을 써내려갔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메시지 보내기 화면이 변하더니 액정에서 0초라는 시간 표시가 보였고 0초는 곧, 1초, 2초로 바뀌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쭈그려 앉은 채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뱉어냈다.
“여보세요?"”
맙소사. 유상현의 목소리였다.
“너 거기서, 그러고 뭐해?”
중요한 건, 유상현의 목소리가 두 군데에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마치 서라운드 입체 음향처럼 핸드폰 안, 그리고 내 뒤통수 너머에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약 일 미터 근방에 블랙슈트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유상현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물론, 그의 시선은 흉측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내게로 향해 있었고.
젠장. 난 이별도 멋지게, 쿨하게 할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가련한 여인인가 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