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장소에 나가야 하는 이유, 나갈 필요가 없는 이유, 나가서는 안 될 이유, 이 세 가지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하지만 그 이유들은 곧 뒤죽박죽 뒤엉켜 단 하나의 이유가 세 가지 모두에 적합되기도 하는 이상 현상을 일으켰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 절~대! 공항에 나가지 않아’라고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지은서가 매니저 몰래 한국에 입국할 거라고 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고생 좀 하게 ‘지은서 몰래 귀국’을 만천하에 유포시킬까도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물론! 익명으로. 하지만 곧 그 생각을 고이고이 접었다. 분명 기자들은 지은서에게 몰래 입국한 경위를 앞다퉈 물어댈 것이다. 만약 지은서가 홧김에 유상현과 환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하다.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이번에는 강도를 좀더 세게—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 졸리와 제니퍼의 기사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의 마무리는 오후 여덟시가 돼서야 끝나버렸다. 기사 원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당차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곤 200원짜리 자판기 믹스 커피 한 잔, 옆 자리의 박 기자가 준 베이글 반 —그것도 크림치즈 없는—주머니 속에 있는 알사탕 하나가 전부였다. 뭐든 요기라도 한 후 집에 가야지, 라는 생각에 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태이는 ‘회의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할게’라고 황급히 핸드폰을 끊은 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라고 걱정의 문자를 보냈다.
피식 웃으며, 대체 누구와 끼니를 때울까, 고민을 하며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세로로 쭈욱 이동해봤다. 아래 버튼을 백 번쯤 누른 후, 순간 이미 지워버린 태지의 번호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문득 태지와 알코올을 섭취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대체 왜?’라는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난 무턱대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새롭게 마음이 간 상대가 생기면 차여버린 옛 애인에게 전화하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은 아닌 것 같다. 태지는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내 저녁 식사 제안에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그와의 약속 장소로 가던 도중, 내가 태지에게 전화를 건 몇 가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를 생각해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태지는 지은서의 이십대 초반 시절, 스타일리스트 보조를 했었다. 한때 태지가 와인 한 병을 비운 후, 자신의 옛 회상을 토로하던 중 ‘지은서 그 년!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악마야’라는 과격한 표현을 하며 젓가락을 하늘 위로 붕붕 휘저으며 울분을 토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위에 쓰러졌다. 그때는 그 말을 허투로 듣고 넘겼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그 말이 떠오른 것이다. 종종 인간의 기억력이 가끔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와 만나기로 한 곳은 청담동의 한 ‘Lynss’이라는 바였다. 모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대표가 얼마 전 새로 오픈한 가게라고 하는데 혹시 아까 강윤지가 말한 가게가 그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하 일층에 위치한 이 바는 곳곳에 개인형 룸이 위치해 충분히 몰래 사귀는 연예인 커플끼리 한잔씩 하러 들르기 가능할 것 같은 구조였다. 구석진 곳에 혼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변태지가 보였다. 나는 자리로 가 테이블 위에 가방을 탁, 소리 나게 얹어놓았다.
“어! 왔어?”
태지가 잡지를 내려놓은 후,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여전히 이쁜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나 태도가 살짝 여성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건 그의 커밍아웃 소식을 접한 후 느끼는 괜한 느낌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레몬티를 마셨다. 막상 만나서 바로 앞에 얼굴을 보고 나니 내 안에 여태껏 묶어두었던 배신, 원망, 미움 등등의 감정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태이보다 더 조잘대고 시시껄렁한 얘기를 쉴 새 없이 하던 이런 아이와 난 연애란 걸 했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자 뭔가 허탈하고 헛헛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왜 그가 나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전까지는 그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눈치 채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멋쩍기까지 했다. 조금만 더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 채고도 남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뎠던 걸까, 니가 잘 숨겼던 걸까. 그런 생각에 나는 씁쓸히 웃으며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식사가 될 만한 안주거리를 시켰다.
“잘 지냈어?”
“응. 덕분에.”
“하하. 근데 유상현과 정말로 사귀는 거야?”
태지가 실눈을 해서는 소곤거리듯 물었다.
“뭐, 그런 것 같아.”
“에이, 대답이 그게 뭐야?”
“그럼 넌 유상현한테 고백한 적이 있다는 건 정말이야?”
내가 흘러가듯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태지에게 말했고, 태지는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고백까지는 아니고 그냥 뭐, 살짝 마음에 품었었지.”
와인을 홀짝대며 웅얼거리듯 말하는 태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특히나 ‘품었었지’라는 대사를 읊조릴 때는 안타까운 미소까지 흘렸다.
“근데 궁금한 건! 그때 나랑 만날 때야, 안 만날 때야?”
진심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태지의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니 대답을 듣지 않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그런데 웬일이야? 니가 먼저 연락을 다 주고.”
“왜? 베스트 프렌드 하자며. 그냥 배도 고팠고 술 한 잔도 땅겼어.”
내가 잔을 들었고 그가 내 잔에 소리 나게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한 잔, 두 잔, 와인 반병이 비워지도록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 중간, 그는 나에게 유상현과 사귀게 된 경위를 물어봤고 나 또한 중간 중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냥 괜스레 꺼내는 이야기인 척 지은서에 대한 정보를 물어봤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지은서 진짜 가관이래’라고 말하니 변태지는 신이 나서 ‘거 봐, 내가 그년은 악마랬잖아’로 시작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뭐, 딱히 유상현과 관련된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패션쇼에 갈 때 다른 연예인이 자신과 같은 백을 소지하고 있으면 그 순간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를 불러 근처 백화점에 가서 이들 중 아무도 들고 있지 않은 백을 사오게 하는 것.’
‘얼굴에 0.1미리미터 크기의 작은 뾰루지라도 나면 그날 촬영을 모조리 엎어버린다는 것.’
‘자신은 정작 위아래가 없으면서 잘 나간다 싶은 여자 후배들을 눈물 쏙 뺄 만큼 괴롭힌다는 것. 그러면서 남자 후
배들에게는 여신처럼 굴면서 더 열 받게 만든다는 것.’
‘드라마를 찍을 때 자신의 분량이 적은 듯싶으면 상대역과 분량을 비교한 그래프까지 그려 감독과 작가 앞에 들이민다는 것.’
‘이름 난 재벌 2세들과는 모두 한 번씩 만남을 가졌다는 것.’
‘마릴린 먼로처럼 샤넬 No.5만 뿌리고 잠이 든다는 것.’
‘스타일리스트나 매니저들을 자신의 몸종처럼 부리고 다니면서, 쇼핑할 때 이것저것 다 입어보고 신겨보면서 단 한 번도 사주지 않는다는 것.’
등등. 여느 잘 나가는 셀러브리티들이 할 만한, 못됐지만 그녀니까 이해돼!라는 반응들이 나오는 행동들이었다.
“근데!”
살짝 취기가 오른 변태지가 내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속닥거리듯 말했다. 난 무슨 비밀인지 싶어 허리와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가까이 갔다.
“진짜 비밀인데! 지은서… 청바지 잘 못 입는다? 생각보다 허리가 길고 엉덩이가 크거든! 그래서! 청바지 잘 안 입어~. 대부분 스커트를 입지.”
뭐,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럼 그녀를 만날 때 청바지를 입어야 하나? 아니다. 난 그녀를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난 별 비밀도 아니라는 듯 다시 허리를 들려고 하는데 변태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건 진짜 진짜 진짜 비밀인데! 뭐, 정말 그냥 루머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일본에 있는 내 친구 스타일리스트가 지은서가 술 먹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데, 지은서한테….”
“지은서한테?”
난 혹시 하는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고 변태지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