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눈꺼풀이 떠지는 동시에, 양손은 자연스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로 향했다. 띵띵 불어서일까? 하루 사이에 질량 불변의 법칙을 위배한 걸까? 내 몸이 어제보다 백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은서로 인해 찝찝하고 불쾌했던 기분들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듯 했다. 나의 단순함에 감사하며 고개를 돌려 거실 벽 정중앙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열한시. ‘에이, 그렇게 잤는데도 열한시야?’라며, 침대로 가 편하게 푹, 자야지 생각하고 몸을 반쯤 일으켰는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저 햇살들은 절대 내가 생각하는 열한시에 존재할 수 없는 거다. 지구 멸망 일보 직전이 아니고서야! 나머지 몸을 벌떡 일으켜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아댔다. 냄새를 맡는 햄스터처럼 킁킁 대며 거실 바닥을 한동안 기어 다녔다. 그때, 부르르르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대체 왜 소파 밑에 있던 핸드폰이 무슨 재주로 TV 밑까지 이동을 한 거지? 수상스런 핸드폰 폴더를 여니 역시나 예상 적중! PM 열한시가 아니라, AM 열한시였다.
액정 위에서 깜박거리는 부재중 전화 30통, 미확인 메시지 10개쯤은 일단 가볍게 무시해 준 채, 빛의 속도로 회사에 나갈 준비를 했다. 실핀, 자, 가위, 발목양말 한 짝 등과 더불어 아무리 사 모아도 끊임없이 사라지는 아이템 중 하나인 검정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밖으로 나섰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에 도착해 시동을 걸 때까지 살짝 거짓말을 보태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슉슉 피해가며 마치 ‘카트라이더’ 경주를 하듯 운전을 하는 도중, 신호에 걸려 정지를 해야 할 때마다 핸드폰에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을 하나씩 꺼내봤다. 대부분이 유상현의 전화였다. 종종 환이의 전화도 있었다. 아침으로 넘어오니 회사 번호. 그중 강윤지의 번호도 있었다.
-어디야?-
-집 앞인데, 왜 전화 안 받아?-
-누나, 전화 안 받아서 보조키 우유 통 안에 넣고 가요. 저나 줄 거죠?-
그러고 보니, 난 어제 이 둘에게 어떠한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지은서의 통화에 혼자 여러 가지 감정을 품고서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젤리나 졸리, 제니퍼 애니스톤 그 둘에게 나와 지은서를 대입시키는 살짝 뻔뻔한 상상을 해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아무 생각 없이 회사로 향하고 있다. 이미 아침 회의가 끝나 각자 일들을 하고 있는 편집실 안을 살금살금 기어들어왔다. 자리까지 와 허리를 펴자 내 앞에서 강윤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편집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입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크게 벌어졌고, 심장은 덜컹, 하고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지만 편집장님은 눈이 아닌 입으로만 씨익 웃은 후 강윤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휴우, 한숨을 내쉰 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사실, 유상현과의 열애설이 터진 후 편집장님은 나지순이라는 본명과 어울리게 나에게 지고지순하게 굴었다. 아마 내가 무슨 연예계 가십거리라도 한 움큼 물고 와줄 행운의 ‘조커’ 라도 되는 양 관대하기가 마치 미륵보살 같았다. 열애설이 시들시들해 약발이 떨어질 때쯤 결별설이 떠돈다면 분명 결별의 이유를 알기 위해 나에게 더 지극 정성을 쏟을 것이다. 술 한 잔, 꽃등심 고기 몇 점, 조각 케이크에 술술 내뱉어진 나의 말들은 진공청소기의 위력처럼 토씨 하나도 빠지지 않고 수집되어 그 주의 플러스 텐 특집 기사로 나올 것이다. 여기저기 내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일들과 말들이 예쁘게 포장된 채로. 그 다음에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이현 씨, 많이 늦었네?”
편집장과 이야기를 끝낸 강윤지가 내 자리로 슬금 다가오더니 물었다.
“근데, 대체 지은서랑은 무슨 관계야? 응?”
난 강윤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은서, 강윤지 이 두 여자가 정말 싫다. 분명 신데렐라의 두 언니들은 이런 분위기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한 명은 신데렐라보다 우수한 사무 능력을 지녔고 다른 한 명은 비교할 수 없는 외모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가 왕자를 차지한 건 단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일까?
“응? 자기 오늘 저녁에 뭐해? 나랑 술 한 잔 안 할래? 괜찮은 와인 바 하나 발견했는데…. 이거 자기한테만 말하는 건데….”
강윤지가 허리를 숙여 내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했다.
“거기, 연예인 커플들 되게 많이 와.”
순간, 드르륵 하고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유상현이었다. 받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던 내게 강윤지가 말했다.
“유상현이야? 아, 유상현도 부르는 게 어때? 좀 소개시켜주라. 친한 직장 동료잖아.”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그녀가 너무나도 가증스럽게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은 분명 일정한 상황에만 적용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웃는 얼굴이 침은 물론 주먹까지 부르고도 남을 테니까.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데없이 폭포수처럼 솟구쳐 오른 용기에 난 핸드폰에 넘김 버튼을 누르며 강윤지의 얼굴에 대고 또렷하게 말했다.
“전, 강 기자님을 한 번도 친한 직장 동료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순간, 강 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금세 능숙하게 표정을 제자리로 돌리며 말했다.
“그래? 되게 섭섭한 걸?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뭐, 그럼 앞으로 친해지면 되지 뭐. 그럼 오늘도 파이팅.”
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다 “와인 마시고 싶음 언제든 말해”를 한마디 더 덧붙였다. 곧, 문자가 도착했다.
-죽은 건 아니지? 걱정된다. 전화 줘. -
유상현다운 발언이었다. 사실 어제 어떻게 환이와의 일이 끝났는지는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금 내 마음은 유상현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다. 환이에게도. 난 핸드폰을 뒤집어놓은 후, 어제 생각했던 안젤리나 졸리와 제니퍼 애니스톤에 대한 기사를 모조리 수집했다. 일이 하나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기사 중, 제니퍼가 안젤리나 졸리에게 골룸을 닮았다고 말한 기사를 보자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뭐, 피트를 빼앗겨 화가 난 애니스톤의 눈에는 졸리의 외모가 형편없을 수밖에 없겠지? 그녀는 졸리가 전혀 아름답지 않고 괴물 골룸을 닮았다는 말까지 친구들에게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에 스타 매거진은 한 술 더 떠, 졸리와 골룸를 비교하는 특집 기사까지 실었다. 거짓말에 능하고 피골이 상접한 졸리는, 브래드 피트의 ‘절대 결혼반지’를 노리고 있다고 스타 매거진은 풍자했다. 졸리와 골룸의 외모를 비교해놓은 사진을 보니 또 한 번 큭큭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만약, 지은서와 내 기사가 저리 뜬다면? 하는 생각이 미치는 순간 웃음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매스컴이나 일반 사람들 눈에는 내가 유상현과의 결혼을 꿈꾸는 어둑하고 축축한 습지에 사는 골룸처럼 비쳐질지도 몰랐다. 씁쓸한 얼굴로 서둘러 보던 기사를 끄고, 메신저 아래로 뜬 기사를 클릭했다. 아이돌 가수가 귀국해서 공항이 마비되었다는 기사였다. 귀국. 인천공항. 그 키워드에 낯익은 목소리가 뇌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모레 다섯시, 인천공항 도착인데 픽업 나올래요?’
지은서. 어제 모레라고 했으니 바로 내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