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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자마자 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파자마로 갈아입은 후,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소파에 앉아 두 다리 사이에 끼었다. 그리곤 차갑고 딱딱한 아이스크림에 아무리 힘을 주어 젖혀도 절~대 부러지지 않는 쇠숟가락으로 열심히 빠르게 퍼먹었다. 리모컨을 이용해 TV도 켰다. 하지만 방송은 나오지 않고 Wii(위)의 첫번째 화면이 떴다. ‘환’이가 떠올랐다. 난 재빨리 외부입력을 누른 후 케이블 전원을 켰다. 마침 OCN에서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서로의 정체를 안 후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이었다. 얼굴이 터지고, 머리칼이 뜯겨가며, 죽기 살기로 서로를 구타하던 그들의 눈빛이 어느 순간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서로를 덮쳤다.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가 꿀꺽, 소리를 내며 기도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분명! 저때부터였을 거다.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톤에게서 안젤리나 졸리에게로 마음을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 제니퍼는 자신의 남편인 피트가 안젤리나 졸리와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를 함께하게 되자 졸리를 만난 자리에서 ‘피트가 당신과 출연하는 것을 매우 기뻐한다고’라며 축하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결국 배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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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스타들이 보여주는 젊음에 대한 집착!과 앙숙, 스타들이 벌이는 흥미진진한 대격돌! 등을 다루는 미국 MTV에서 방영하는 이색적인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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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에서 방영하는 ‘올 액세스<All Access>*’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서 할리우드 최고의 두 스타 제니퍼 애니스톤과 안젤리나 졸리의 이색적인 대결을 방송한 적이 있다. 총 세 개의 대결로 이루어졌는데 첫번째 대결은 ‘누구의 아빠가 더 멋진가’ 두번째 대결은 ‘누가 더 잠자리가 뛰어날까’ 세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대결은 ‘둘이 몸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였다.
첫번째 대결에서는 제니퍼 애니스톤이 이겼다고 한다. 두 사람의 아빠는 둘 다 유명 배우였다. 아니, 유명도로 따지자면 안젤리나 졸리의 아빠인 존이 더 유명했다. 하지만 존은 안젤리나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으며 독설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반면에 제니퍼의 아빠는 딸이 배우가 되는 것에 큰 도움을 주며 그녀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두번째 대결 ‘누가 더 잠자리가 뛰어날까’는 예상대로 안젤리나 졸리의 승이었다. 그녀의 야생적인 본능적인 섹스어필을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그런 남자는 없다고 본다.
세번째 대결에서는 치열한 승부가 벌어졌다고 한다. 둘 다 모두 탄탄한 몸매와 강한 체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툼레이더’에서 강인한 여전사로 활약한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히 승자는 졸리지만 ‘올 액세스’는 제니퍼에게 손을 들어줬다. 이유인즉슨, 남편을 빼앗긴 분노로 인해 제니퍼가 졸리를 이긴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말도 안 되는 대결의 승자는 제니퍼 애니스톤이었다.
그래. ‘다음주 셀러브리티 기사는 할리우드의 두 톱스타인 이 둘의 이야기로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입안에서 반복적으로 얼얼한 아이스크림이 스르르 녹고, 초코칩이 톡톡 거리며 입안에서 터졌다. 난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렸다. 순간, 지은서가 인터뷰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확한 달걀형의 조막만한 하얀 얼굴, 웃으면 쏘옥 들어가는 사랑스런 보조개, 청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볼륨 있는 몸매. 윤기가 흐르는 웨이브 머리, 자신감과 애교로 무장된 톡톡 쏘는 말투, 특히나 웃을 때 가느다란 하얀 손을 이용해 자신의 찰랑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그녀 특유의 제스처는 뭇 남성들의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문득, 만약 내가 올 액세스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녀와 대결한다면? 이라는 엉뚱한 질문이 들었다. 더 멋진 아빠? 그녀의 아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잘 안다. 내가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집구석에서는 나도 한때 ‘공주님’이었단 말이다. 그럼 잠자리? 이건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문제이지 싶다. 그리고 여자 입장으로써 내가 그녀에게 한 표를 던지기도 싫다. 마지막으로 몸싸움? 그것만큼은! 단연코 내가 이길 자신이 자신 있다. 만약 이런 대결 구도라면 이 승부에서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승리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무승부라든지. 하지만 만약 다른 대결들이 첨가된다면 난 그녀에게 99퍼센트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것도 처참하게. 난 그녀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이미 반쯤 비워버린 아이스크림 통을 바닥에 내려놓곤 숟가락을 입에 문채 하늘을 향해 달랑거리며 누워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왕자를 사랑한 공주는 행복하지만 왕자를 사랑한 시녀는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솔직히 옛 시절, 시녀만큼 가슴앓이를 한 이들은 없을 것이다. 공주 곁에 있는 왕자를 보며 항상 가질 수 없는 환상을 쫒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은가.
지은서가 유상현을 다시 되찾는다면, 그들은 국민 커플이 되어버린다. 세상은 나 같은 건 금세 잊고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그들을 추앙하고 부러워하겠지. 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이 현빈과 송혜교 열애설에 열을 올리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난 TV에서, 신문에서, 인터넷 매체에서 날마다 봐야 할 것이 분명했다. 눈이 점점 감겨왔고, 뭉클뭉클 피어오르던 생각들이 형체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잠이 든 후 깼을 때, 유상현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니, 환이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
아니, 조금 더 바란다면 유상현의 차를 박기 이전으로 아~예 시간을 되돌렸으면 좋겠다.
평범한 남자와 연애하며 때때로 다투지만, 이런 세간의 이목과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감과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느끼는 패배감은 모른 채로. 그냥 셀러브리티를 꿈꾸며, 왕자님과의 사랑을 꿈꾸며, 발랄하게 발칙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때로.
난 그렇게 서서히 잠이 들었다. 몽롱한 기운이 가득 찬 정체모를 곳에서 초인종 소리와 핸드폰이 울려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지만 내가 핸드폰을 향해 아무리 손을 뻗어도 핸드폰은 깔깔대며 내 손을 요리 조리 피해만 갔다. 그 웃음소리가, 몸짓이 마치 지은서를 닮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