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런데요.”
“아, 다행이네. 맞아서.”
그 말을 하고 꺄르르, 간드러지듯 웃는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 당신이 다닌다는 플러스 텐에 전화했거든요! 강…윤지? 그 사람이 당신 번호 알려줬어요. 자신과 제일 친한 동료 기자라면서.”
대체 이 정체불명의 여자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강윤지가? 나랑 제일 친한 동료 기자라고? 윽. 차라리 ‘이거 비밀인데… 어제 우리 집 강아지가 말문이 텄어!’라는 황당한 고백. 아니, ‘너 변태지 디자이너랑 베스트 프렌드라며?’라는 해괴망측한 질문을 받는 게 조금은 덜 기가 차겠다. 어쨌거나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흘러나왔고, 그 소리는 고스란히 핸드폰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되었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그녀는 내 반응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어디에요?"
어라?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상대방의 위치를 묻다니. 게다가 목소리 톤조차 심히 건방졌다. 기분 나쁜 기운이 시커먼 색의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몸 전체에 퍼졌다. 이대로 ‘네, 전 어딘데요’라고 순순히 대답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까지 들렸다.
“그… 그쪽은 어딘데요?”
“나요? 지금 비행기 안이요. 아, 잠시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누군가에게 일본어로 뭐라고 말했다. 물론 또박또박 다 들렸지만 난 전혀 한마디도, 한 음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해석할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녀는 스튜어디스라고 추정 지어지는 그 누군가에게도 굉장히 거만한 말투로 까칠하게 말한다는 거였다.
“웃겨. 비행기는 꼭 이륙하기도 전에 핸드폰 끄라고 난리들이야. 그죠?”
뭐,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기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나보다 약간 더 키가 크고 살짝 더 웃음을 잘 짓는 그녀들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훨씬 직전부터 핸드폰을 끄라며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협박한다.
“마음에 안 들어 죽겠어. 아, 그나저나 어디냐니까요?”
그녀가 대답했으니, 나도 이젠 답하는 수밖에 없다.
“아… 전, 차 안인데요?”
“그래요? 자기 차?”
“네? 네. 제… 차요.”
“잘됐다. 그럼 운전할 수 있다는 거네? 나 지금 홍콩 가거든요? 그리고 모래 다섯시 인천공항 도착인데. 픽업 나올래요? "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몇 옥타브나 올라갔다. 발렛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깜짝이야. 내가 지금 매니저 몰래 가는 거거든요. 그럼 모래 다섯시 인천공항에서 봐요. JAL 항공. 계속 끊으라고 난리네. 그럼!”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난 소리쳤다.
“잠깐만요. 누구신데요!”
사실, 묻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머! 내 목소리도 몰라? 강윤지는 바로 알던데. 나요….”
갑자기 그녀가 목소리를 자그마하게 바꾸었다.
“나… 지은서예요.”
그래. 지은서. 예상했던 바다. 난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꿀꺽 침만 삼켰다.
“근데 그쪽, 여자들끼리의 약속 잘 지켜요?”
“네?”
“잘 지키죠? 음, 당신과 내가 만나는 거 상현이에겐 일단 비밀이에요. 물론, 환이한테도. 근데 왜 유상현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매력을 느낀 거지?”
“네?”
“왜 그렇잖아. 보그나 싱글즈, 코스모폴리탄같이 잘 나가는 잡지사의 편집장도, 발행인 딸도 아닌, 플러스 텐에서 기자 같지도 않은 일하는 유치한 직업을 가진 여자한테? 인터넷 사진 보니까 얼굴도 그냥 그렇던데. 사실 나, 수준 떨어져서 마음에 안 들어. 암튼, 그날 봐요. 아! 그리고 나 유상현 다시 가질 거니까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 주지 마요. 이틀 동안 마음 정리해두면 더욱 좋고. 그럼.”
‘나 유상현 다시 가질 거니까’를 강조하며 말한 그녀가, 내가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툭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간, 내 뇌 속의 빨간색 파란색 사고회로 선들이 얼기설기 얽혀 파지직, 파지직 거렸다. 편두통이 시작된 것이다.
지은서.
지은서.
사실 ‘백이현 씨예요?’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난 지은서라는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애써 부인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저 여자 ‘싸가지가 하늘을 찔러 대기권 밖으로 나가 우주를 돌고 돈다’는 소문 이상이다. 대체 자기가 무슨 권리로 나한테 유치한 직업을 가진 여자래? 게다가 얼굴도 그냥 그렇다고? 대한민국 최고 셀러브리티면 그딴 이야기를 아무한테나 멋대로 하며 남을 모욕해도 되는 거야? 사실 지은서, 그녀에게 받은 모욕으로 화도 짜증도 났지만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내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발신 버튼을 눌러봤지만 핸드폰은 이미 오프 상태였다. 계속 되는 분노 게이지와 자책 게이지의 상승 상태에서 난 강윤지의 번호를 찾아 힘껏 눌렀다. 두세 번 통화음이 들리더니 ‘인터뷰 중’이라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남자들은 종종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한다.
‘여자들 참 이상해. 우리한테 잘 보이려고 미니스커트 입은 거 아니야? 근데 왜 힐끔힐끔 보면 기분 나쁘다고 해? 순 내숭덩어리들 아냐.’
그리고 그런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혀를 끌끌 차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여자들은 자기 애인 만나러 갈 때보다 여.자.친.구.들 만나러 갈 때 더 신경 써. 아마 수백 번도 더 긴장하며 거울 볼 걸? 왜? 그녀들한테 뒤지기 싫거든. 그리고 여자가 최고로 꾸미고 나가는 장소가 어딘지 알아? 자신이 만나는 남자와 연관되어 있는 여자를 만나러 갈 때!’
여자의 자존심 수치는 여자들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보다 더 예쁜 옷, 더 고급스러운 가방, 더 비싼 구두, 더 빛나는 귀고리, 더 근사한 애인. 여자들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것들을 원한다. 그건 여자들이 ‘공주’의 신분을 원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인 ‘왕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그러기에,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여자.
나도 한때 공주를, 셀러브리티를 꿈꿨다. 내가 그토록 원했지만 가지지 못했던 것을 모조리 소유하고 있는 ‘여자’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오늘 내 자존의 수치는 그녀로 인해 바닥을 쳤다. 때때로 여자는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고, 소모적인 자존심이라는 감정 때문에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묻어두기도 한다.
유상현과 환이 어떤 결말을 지을지.
환이 유상현에게 어떤 말을 할지.
내일 강윤지에게 어떠한 말로 따질지.
이런 것 따위는 지금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집에 가서 칼로리는 높지만 스트레스 지수는 줄여주는 새카맣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초콜릿을 무지막지하게 입에 넣은 채 아작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고 싶었다. 난 그대로 차에 들어가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았다. 부웅 차가 출발했고 나를 향해 뛰어오며,
“아가씨! 발렛비 오천 원이요.”
라고 소리치는 발렛 아저씨가 백미러로 보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