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석유가 흥건하게 고여 미끌미끌한 바닥 위에서 불이 붙은 성냥을 들고는,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마냥 좋아 꺄르르 웃으며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 아니 아니, 강도들이 인질의 무릎을 바닥에 꿇려 놓고 머리에 총구멍을 겨눈 채 일 분 동안 백만 불을 007가방, 꼭 검정색 007가방!에 넣어오지 않으면 '빵' 쏴버리겠다고 ‘60초, 59초, 58초…’ 거꾸로 초를 세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
이 상황은 분명! 그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아슬아슬 했다. 게다가 지금 유상현이 오른쪽 손목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 검지손톱으로 테이블 위를 딱딱 거리는 저 소리. 저 소리는 마치 긴장 효과를 주기 위한 빼어난 효과음 노릇을 했다.
순간, 효과음이 멈추더니 유상현이 입을 열 모양새를 보였다. 그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내 침이 기도로 꼴깍, 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나는 창피함을 감출 의도로 살짝 물 컵을 집어 들었고 그와 동시에 유상현이 갑작스레 고개를 꾸벅 숙이는 괴이한 행동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저건 또 무슨 행동이지?’ 하고 불안해하며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걸 시작하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불쑥, 내뱉었다.
“미안.”
푸핫, 하마터면 마시던 물이 공중에 뿜어져 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 예쁜 오색빛깔 무지개를 만들 뻔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몰래 환이의 표정을 보니 환이도 의외인 유상현의 반응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굳이 표현하자면! 아이가 결국엔 성냥을 떨어뜨리고 성냥이 추락해 바닥에 닿는 그 순간 성냥개비에서 힘차게 타던 불빛이 피슈슉,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석유가 아닌 물에 의해 홀연히 사라지고, 강도가 일 초까지 세고 질끈 눈을 감은 채 당겨진 방아쇠 소리에 다들 기겁해 꺄악, 소리를 질렀는데 총에서 빠른 속도로 삐져나온 것은 탄알이 아니라 폭죽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 빠지는 상황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친 듯이 뛰던 맥박에 진정을 주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게 하는 한편, 싸울 의지와 의욕 등을 마법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어버린다.
한마디로 전.의.상.실.
환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서는 손을 뻗어 물 컵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물 컵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는 환이의 눈이 다시 차가워졌다.
“장난해, 지금? 이렇게 쉽게 사과해버릴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면 좋았잖아!”
“정말, 미안하다. 너한텐 할 말이 없어.”
유상현은 다시 한 번 사과했고 환이는 그런 그를 무심하게 쳐다봤다. 가끔 그런 눈이 무서울 때가 있다. 차라리 분노로 활활 불타고 있거나, 미워 죽겠다고 써 붙이고 있는 것보다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감정을 감지할 수 없어서 더 무서운. 지금 환이의 눈이 딱 그랬다. 빤히 유상현을 바라보던 환이가 고개를 돌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질 듯한 그 한숨 끝에 뭔가 눈물이 묻어났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을까. 한숨을 쉬다가 상현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하게 웃다가, 다시 멍하니 상현을 보다가. 한참 동안 먹먹한 눈으로 상현을 바라보던 환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말투였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진정된 듯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아냐고 일방적으로 지르기보다는 유상현의 입장이 어떠했을지, 왜 그랬던 것인지를 물어보는 환이가 갑작스레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갑작스레는 아니다. 키스를 했던 그날처럼.
“나랑 삼촌이랑 얼마나 사이가!”
환이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아마도 삼촌이란 단어에서 자신 스스로 아이러니를 느꼈나 보다.
“삼촌이라고 불러. 나도 아직은 그게 편해. 그리고 차근히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유상현이 진지한 눈빛으로, 신뢰가 가는 목소리로 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난 이 사건에 있어서는 ‘관계자 외’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달싹거리지도 못한 채 애가 탄 엉덩이를 뭐라고 핑계를 대고 해방시켜야 할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살짝 긴장감이 해소되니 이제 슬슬 내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난 후, 환이와 유상현이 자신들끼리의 감정을 원만히 해소하고 지은서의 이야기까지 모두 휘몰아치듯 다 해버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들이 모두 다, 끝난 후 이야기의 주제는 분명…은 아니지만, 나로 흐를 가능성의 퍼센테이지가 제로나 한 자리 수의 수치보다는 높았다.
그쪽, 할아버지, 청국장, 환이와의 거래, 그리고 제일 중요한 환이와의 키스 등등등.
절대로 안 될 노릇이었다. 환이의 키스가, 거래의 조건이 환이의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키스를 나눴다는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꽤나 꺼림칙한 일이다. 선덕여왕이나 미실이 살던,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형의 여자를 아우가 물려받는 일이 별 대수가 아닌 시대, 배륜과 비도덕보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 시대는 애석하게도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난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크기로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어찌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아직 환이는 내가 유상현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것은 모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정말로 자신과의 거래 조건대로 유상현을 유혹한 후 이제 자신에게로 올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유상현과 환의 관계가 완벽하게 호전된다면? 그렇다면! 유상현이 미워서 했던 그깟 거래 따위는 새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 자신의 아빠의 스쳐가는 또 한 명의 여자쯤으로 취급해버린다면?
또, 하지만 환이가 만에 하나 내게 진심이었다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안으로 땀이 차오르니 왠지 모르게 핸드폰이 만지작거리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몇 시인지도 궁금했고, 문자 한 통 없는 핸드폰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환이에게 유상현 몰래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얘기가 끝난 후, 단 둘이 따로 이야기를 하자’라는 식의.
“해봐! 들어는 줄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환이가 애써 유상현의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동안 난 최대한 부산을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뒤적거렸다.
“바로 이해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
“일 년, 아니 십 년, 아니 평생이 걸릴지도 몰라.”
그 말에 유상현이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휴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적어도 삼십 년은 더 살지 않을까? 이십 년으로 치자. 그래야 남은 십 년 동안 다시 사이좋게 지내지.”
분명 환이는 유상현의 이 말에 또 몇 퍼센트의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난 아직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발견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찾지 못했다. 내가 가방을 부스럭대자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난 괜찮다고,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나누던 이야기를 나누라는 제스처로 오른손을 선서하듯 슬쩍 들어 앞뒤로 흔들고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찾았다. 아무래도, 차에 두고 온 게 분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핸드폰을 찾아오겠다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밖으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빽빽이 늘어선 고층 건물, 아파트, 주택, 상가, 꼬불꼬불한 저 거리들. 조그마한 점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문득 저 안에서 이루어 졌을 일들—내가 유상현의 차를 박은 일! 환이가 날 찾은 일—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발렛 파킹 해주는 아저씨에게 놓고 간 것이 있다며 차 키를 받아 차 문을 열었다. 다행히 핸드폰은 운전석 시트 위에 얌전히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집으려고 하는데 모르는 진동소리가 들렸다. 액정을 바라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조심스레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를 들은 한참 후, 핸드폰에서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이현 씨 핸드폰인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