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
“누나!”
스테레오로 들리는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닫히기 직전인 엘리베이터에 슬쩍 올라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백치아다다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는 닫힘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론 슬며시 이별을 고하는 손을 흔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힘겹게 다시 몸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얼굴 근육이 오랫동안 방치해둔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는지 그 어떠한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앉지 그래? 환이 너도.”
유상현이 자리에 앉으며 평소와 같이 거만과 딱딱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도 지금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평소 왼쪽 다리를 즐겨 꼬던 그가 오른쪽 다리를 꼬았다가 불편했는지 금세 방향을 바꾸었고, 이미 비어버린 물 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이 쑥스러웠는지 큼큼거리며 계면쩍은 헛기침을 했다. 아마, 환이도 느꼈을 것이다.
“뭐야, 난 갈래.”
환이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벅저벅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서로의 어깨가 살짝 스치는 그 순간, 발걸음을 멈춘 환이가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실망이에요. 역시 누나도 똑같아.”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에 뭔가 가슴 한 구석에서 커다란 원석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도, 어떠한 말도 할 새 없이 내 오른손은 환이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환아, 그러지 말고, 저녁이라도 먹고 가자.”
환이를 붙잡고 있는 조그마한 내 손도,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먹고 가. 너… 나랑 할 이야기 있잖아.”
유상현이 내 말을 거들었다. 환이 유상현을 째려봤다. 잠시 말없이 유상현을 빤히 쳐다보던 환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을 잡은 뒤, 옷자락에서 때어냈다. 맥없이 내 팔은 바닥으로 떨어뜨려졌고 환은 유상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의자를 슥 빼서는 부러 쿵,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나도 총총 걸음으로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말해봐. 할 말이 있다는 게 신기하네.”
“…신기한 일이니 잘 들으면 되겠네.”
유상현과 환의 말과 눈빛이 허공에서 짧게 부딪혔다. 파바박,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새 몇 마리쯤은 너끈히 감전사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해 심장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수명이 한 십 년쯤은 줄어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수명이 주는 것 따위야 지금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지만, 급격한 심장의 두근거림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스트레스는 곧, 피부의 적이다. 또! 피부의 적은 여자의 적이다. 나는 바싹 타오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수분을 준 후 천천히 열었다.
“저, 저는 잠시 나가 있을까…요?”
유상현이 환이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을 쓰윽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적인 예의의 미소를 슬쩍 지은 나는 환이와의 눈빛을 애써 피한 후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어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세차게 잡았다. 욱씬, 거리는 아픔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환이었다.
“앉아요. 누나가 부른 거고, 난 누나 보러 온 거니까. 밥 먹고 가라면서요. 먹고 가요, 우리.”
환이의 표정과 손목에 느껴지는 힘에서 그의 의지가 보였다. 내가 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환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적잖은 거리감이 느껴지고, 약간은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내가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앉은 후, 유상현은 프라이빗 룸 매니저를 불러 자신이 부를 때까지는 이 방에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고 위엄 있게 말했다. 고급스런 외모의 매니저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워진 물 잔으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물을 따랐다. 쪼르르 물이 흘러내리며 유리 병 안에 동동 떠 있는 레몬들의 시큼 새콤한 향이 은은하게 룸 안을 감싸 앉았다. 그 향으로 인해 잠시나마 심신이 편안해졌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그녀가 사라진 후, 룸 안은 레몬 향 대신 적막으로 메워졌다. 둘 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새빨간 입술을 앙 다물고 있었다. 난 그동안 프라이빗 룸을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얼마 전 웨딩마치를 올린, 한때 그녀가 하는 머리띠, 방울, 심지어 요요까지도 모두 그녀가 하는 것만으로 유행이 되었던, 하지만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최고의 셀러브리티였던 여배우가 즐겨 찾았다던 프라이빗 룸이었다. 그녀뿐인가, 셀러브리티들이 종종 남의 이목을 피해 애인과 가족과 친구와 식사를 하는 곳이다. 종종 기사에서도 봐왔기에 대번에 그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끼 식사에 지금 들고 있는 가방 하나 값을 지불해야 하는.
문득 돈이 많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곳에서 ‘빨리 줘요’, ‘내가 먼저 왔는데요?’ 따위의 신경질 섞인 클레임은 불필요할 것이다. 프라이빗 룸의 고객 은 일단 비교할 다른 고객들조차 주위에 없다.
“말해봐. 어찌 된 일인지!”
환이가 먼저 적막을 깼다.
“흥분하지 말고 말해.”
“어떻게? 지금까지 삼촌이라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아빠라는데! 내가 지금껏 엄마라고 불러왔던 사람이 이모라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아, 그래요? 그렇군요! 저는 전혀 흥분이 안 되네요. 어? 오히려 막 침착해지네요.’ 그래야 돼? 그게 될 거 같아?”
“…환아.”
내 눈에 보이는 유상현의 얼굴에는 지난날의 상처가 역력히 드러났다. 자신이 당했던 상처를 고스란히 자식에게 대물림해준 것이다.
“너무 유명해서 그랬어? 내가 있으면 그 잘난 인기에 지장이라도 생길까 봐? 그깟 인기 때문에 자식을 조카라고 세상에 속이냐? 그런 식으로 살 거면 나 같음 그까짓 거 안 해먹어. 셀러브리티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겉으론 웃고 속으론 짜증내고, 열라 백조처럼 바동거리면서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얻은 듯 고고하게 행동하고! 평소에 마음에 안 든다고 칭얼거리던 제품도 씨에프 제의 들어오면 신나서 하고, 다 마음에 안 들어. 가식덩어리들!”
환이가 쉬지 않고, 자신이 숨겨왔던 감정들을 폭발했다. 살짝 눈물이 고인 채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던 환이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마음 한 켠이 씁쓸해졌다. 다시 한 번, 적막이 흘렀다.
그래, 정말 텔레비전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삼촌이 아빠가 되고, 누나가 엄마가 되고, 그렇게 족보가 스크루처럼 꼬여버리게 되는 일 같은 것.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어릴 때 왜 우리 엄마나 아빠는 왕이나 왕비가 아닐까를 생각하며, 하룻밤 자고 나면 뭔가 달라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 공주를 포기했을 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가난한 집의 딸인 여자 주인공이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부잣집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대목이 나오면 엄마를 툭툭 치며 ‘솔직히 말해봐! 나도 친부모님은 따로 있는 거지?’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묻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투정이었고, 장난이었고, 상상이었다. 엄마 아빠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거나 기존의 가족 관계에서 촌수가 휙휙 줄거나 확확 늘어나버리는 그런 건 현실로는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문득, 지은서라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셀러브리티’의 삶을 택한 여자, 아니 ‘셀러브리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택한 여자. 환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걸까? 유상현 역시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일단!”
이번에는 유상현이 적막과 나의 상상을 순식간에 깨버렸다. 홱, 고개를 돌려 환이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은 없었다. 오로지 전투태세에 임하는 듯한, 단단한 의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유상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차갑게 환이를 바라보고 있는 눈에는 환이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물러나지도, 지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겠다’라는 투지가 느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헉, 하고 숨이 막혀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