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젤리나 졸리 vs 제니퍼 애니스톤
Q. 지금껏 숱한 염문설이 있었지만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왜죠? A. 글쎄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그냥, 떳떳하게 한번 연애를 해보고 싶었어요. 모자 쓰고, 선글라스 끼고 그렇게 007 작전 하듯 하는 연애는 이제 싫거든요. Q. (놀라서) 어? 그럼 지금껏 그렇게 연애를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A. 노코멘트로 해두죠. 그런데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과거를 묻는 건 좀 심하지 않나요? (웃음) Q. 그렇네요, 하하. 그럼,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 하나 여쭤볼게요. 여자 친구분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드셨어요? A. 썩,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빼어난 외모, 빼어난 몸매, 착한 여자. 사실 뭐 이렇진 않아요. (고민) 뭐랄까, 즐거워요. 같이 있다 보면 솔직해지고요. 아, 속세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어릴적 순수했던 꿈을 잊지 않는 모습이 귀여웠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적 꿈이 공주님이었대요. 공주님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난 후, 꾼 꿈이 셀러브리티고요. 근데 정작, 셀러브리티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된 거죠. 인생 참 아이러니 하지 않아요? (웃음) Q. (음…) 그럼 셀러브리티가 되기 위해 유상현 씨와의 연애를 원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A. 뭐, 그럴 수도 있겠죠? Q. (놀라서) 네? A. 그걸 목적으로 저에게 접근한 여자들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시작이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은 둘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거죠.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
“유상현 얘 어쩜 이렇게 거만하니?”
태이가 잡지 my style의 기자 이서정과 유상현의 대담을 정리해놓은 페이지를 골똘히 보며 재잘거렸다.
“흠… 그래도 멋지긴 하다.”
열 권도 넘는 9월호 잡지들이 각자의 개성 넘치는 표지 스타일을 자랑하며 태이와 내 주위에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그중 플러스 텐도 있다—저 많은 잡지들 중 단 한권도 유상현과 나의 기사가 실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평균적으로 우리의 기사가 차지하는 지면은 대략 5페이지, 주부를 상대하는 두꺼운 잡지는 기자들의 상상력이 빛나는 루머들까지 포함해 10페이지 가까이를 우리 기사로 도배했다. 어쩌면 단순히 기사의 양! 인터뷰 의뢰의 양!만으로만 본다면 난 그토록 원하던 '셀러브리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마냥 들뜨지만은 않았다.
“근데, 너 이제 솔직히 말해봐!”
그 많은 잡지를 언제 다 읽었는지, 마지막으로 보던 잡지를 내팽개치고는 엉덩이를 질질 끌며 기어오다시피 내 옆으로 온 태이가 양팔로 얼굴을 기댄 채, 엎드려 누워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채근했다.
“뭘?”
“몰라서 물어?”
“응. 몰라서 물어. 아니, 알아도 모를래.”
나는 애써 태이를 외면한 채, 이미 본 기사를 다시 한 번 읽는 척했다. 사실 태이에게는 100퍼센트 진실로 이루어진 풀 스토리를 알려줘도 상관없었다. 그녀와 나는 그만큼 막역한 사이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한다는 게 조금은 꺼려졌다. 그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무한 수다’가 지니는 위험천만한 파괴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은 친구인 나에 대한 의리로 말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몇 번이나 툭툭 때리며 참아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거 내 친구 이야긴데, 절대 절대 말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되는 비밀의 수다는 어느 샌가 핫(hot)하고 다양한 레퍼토리들로 변종 업그레이드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 비밀을 외부로 새어나가게 한 책임자를 추궁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어? 미, 미안해. 그런데 난 한 사람에게밖에 말 안 했어. 절대 비밀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 사람 비밀 잘 지킨단 말이야.’
‘내가? 아니야. 내가 그런 걸 왜 말하고 다니겠어?’
‘야. 너 진짜 서운하다. 나 진짜 아니거든? 니가 술 취해서 말하고 다닌 거 아냐?’
추궁을 할수록 어째 더 씁쓸하고 기운 빠지는 책임 공방전이 이 ‘비밀의 무한 수다’의 결말이다. 결국은 어찌 됐든 비밀이란 걸 내 입으로 타인에게 말해버린 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참은 난 보던 잡지를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
“응. 나 곧, 약속 있어.”
“누구랑? 유상현이랑?”
난 대답 없이 우물쭈물 거리며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유상현과의 열애설 후 내가 만나는 인간관계의 99퍼센트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상현과 나의 이야기를 더 궁금해 했다. 모든 대화가 ‘유상현’으로 시작해 ‘유상현’으로 끝나버렸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유상현이란 인간을 알기 위한 매개체로 전락해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아! 내 이름을 빌려—엄밀히 말하면 유상현이다—쇼핑몰을 론칭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한 다스였다.
'돈은 내가 댈 테니, 넌 이름만 빌려주면 돼. 저기, 지분은 얼마면 될까?'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어 철푸덕 엎어져 있는 네이비 색 가방을 끌어왔다. 프라다 네이비 양 가죽 가방. 유상현이 뇌물로 준 프라다 곽 안에 얌전히 자리한 채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얌전히 봤던, 바로 그 가방이다. 그리고, 오늘 난 그 뇌물을 받은 대가로 유상현과 환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는 뇌물도, 대가도 아니다. 난 진심으로 그 둘이 화해하길, 환이의 상처가 씻겨지길, 내가 환이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오늘 저녁에도 여기서 잘 거야?
몸을 데구르르 180도 굴려 등을 바닥에 대곤, 내가 아까까지 보던 잡지를 하늘 높이 치켜들어 아령하듯 위 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태이가 물었다.
“음…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올 때 맛난 거 사올게, 친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와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았다. 엑셀을 밟는 발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난 그날, 그러니까 유상현과 정말 연인 사이가 된 이후로 대부분의 숙식을 태이네 집에서 해결했다.
이유는 '환'이였다.
유상현의 집 앞에 포진된 기자들로부터 도망치듯 집으로 왔을 때, 나를 기다리던 환이와 마주했을 때 나는 그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환이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본인에게 하는 것도 미안했고, 환이의 비밀을 알아버렸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미안했다.
자는 둥 마는 둥,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일어났을 때 환이는 부엌에서 서툰 솜씨로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부엌은 전쟁터 같았고,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처참한 것들뿐이었지만 날 위해 부산을 떨며 차린 정성이 고맙고 미안해서 몇 숟가락이나마 맛있게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 어렵사리 말했다. 새로 맡게 된 프로젝트가 팀플이어서, 한동안 못 들어올 것 같다고. 환이가 그 말을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밥 잘 챙겨 먹어요’ 라고.
벌써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환과 핸드폰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간 유상현과 나는 간간히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평범한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몰랐던 상대방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특히 유상현은 내가 각국의 왕자님들께 편지를 쓴 이야기를 들을 때는 거의 까무러치듯 웃었다. 나도 환이가 유상현에 대해 정보성으로 알려준 것들을 포함해 더 많은 것들을 그의 입으로 눈빛으로 직접 보고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가 환이로 흐를 때면 우린 둘 다 진지해졌다. '어떻게 하면 환이가 가장 상처받지 않고 모든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큰 과제였다. 그때마다 난 처음부터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이야기, 환과 한 거래, 환과 나눈 키스에 대해 고백을 할까 말까 망설였고, 그것은 결국 망설임으로 끝을 냈다. 어쩌면 오늘 모든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 난 내 스스로 자진해서 지뢰밭을 만들고,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야?
-누나, 나 도착했는데 누난 어디쯤이에요?
씁쓸히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멍하니 무의식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고 있던 차에, 두 사람의 문자가 시간차로 날아 들어왔다. 유상현과 환이었다. 정말 타이밍도 이 정도면 환상의 커플이었다. 아니, 환상의 부자라고 해야 하나.
유상현과 진짜 연인이 된 지 일주일 째. 환이와 서먹해진 것도 역시 일주일 째. 더 이상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끌다가는 환이에게 더 못 할 짓을 하게 될 게 뻔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의 문자를 번갈아 보다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프라이빗 룸이 위치한 층을 꾸욱, 눌렀고, 이내 문이 닫혔다. 한 층 한 층 올라감에 따라 엘리베이터 LCD의 숫자가 변해갔고, 내가 처음으로 꺼낼 말도 이리저리 바뀌어졌다.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삐딱하게 서 있는 환이와 그 맞은편에 무심한 듯 시크하게 서 있는 유상현이 눈에 들어왔다. 폭풍 전야 같은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 저절로 바짝 긴장이 되어버리는 듯했다. 마른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 풍선들이 부풀어져 하나씩 머리 위로 둥실거렸다.
어차피 둘이 해결해야 하는 종류의 일이잖아? 그래. 부자 사이에 괜히 끼면 안 되지. 이렇게 만남을 주선하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야.
나는 아직까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을 뒤로 하고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그때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남자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에 꽂혀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