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시간 전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아직도 제대로 실감나지는 않았다. 마치 엄청난 것으로부터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강타당해 버린 것 같은, 그런 얼떨떨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위태롭게 달랑달랑 거리는 혼을 애써 부여잡고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짜잔, 하고 나타난 환이가 물었다.
"누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나 위 완~전 열심히 해서 신기록도 세우고 새로운 게임 얻어냈는데! 어라? 없네?"
환이는 내 손에 들린 꽃과 프라다 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떡볶이 순대 콜라. 그제야 환이의 문자가 떠올랐다.
"에이, 기다렸는데."
"…아, 미안."
“…누나. 무슨 일 있었어요?”
“…어?”
“…괜찮아요? 얼굴이 많이 안 좋….”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나를 보던 환이가 내 곁으로 스윽 다가왔고, 그 특유의 눈망울로 나를 살폈다. 마치 모든 걸 한순간에 들켜버릴 것 같은 불안함마저 들게 하는 눈이었다. 환이와 했던 약속도, 거래도 지키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마음을 들켜버리면 어떡하지. 유상현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들켜버리면 또 어떡하지. 너한테 미안해서 나 어떡하지.
순식간에 증식되어버린 생각들에 머리가 어질했다. 환이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내 이마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나는 슬쩍 뒤로 고개를 빼며 환이를 피했다. 순간, 환이의 눈빛이 부모에게 외면당한 어린아이의 눈빛과 같이 서글프게 흔들렸다. 그에 심장이 욱씬거렸지만,
“환아. 나 회사에서 일이 좀 있었어. 나 좀 쉴게. …미안해.”
라는 거짓말과, 미안하다는 말로 거실을 빠져나와 노트북을 들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와버렸다. 이미, 인터넷은 나와 유상현의 기사로 도배되었을 것이다.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일단은, 그것들을 환이가 보지 않길 바랐다.
침대에 지친 내 몸을 맡긴 나는 오늘 밤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내가 너 사랑해도 될까?’
분명,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둘뿐이었던 그 공간에서 날 제외한 오직 한 사람은 유상현뿐이었다.
"…뭐, 뭐라고요?"
믿기 힘든, 꿈같은 말을 내뱉은 그는 대답 대신 그윽한 눈빛으로, 달콤한 혀로, 야릇한 손짓으로 내 몸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도록.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 아련히 흔들거리는 유상현의 얼굴이었다. 엷은 커피 향기가 코끝을 향기롭게 간질였다. 그제야, 내가 세상모르고 잠에 흠뻑 빠져 있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유상현네 집 소파 위에서! 머리에 사뿐히 꽃을 꽂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미쳤다'라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치켜세우고 앉은 나는 눈을 비벼댔고,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매만지며 정리하면서 혹시나 침은 흘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훔쳐냈다. 거의 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하하하."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유상현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시원스럽게 웃었다. 다행히 손등에 축축한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깼어요? 아, 아니 언제 잠들었어요? 우리?"
"이야기하다 소리 없이 잠든 건 그쪽부터고, 깬 건 좀 전에. 누구 핸드폰이 하도 울려서 말이야."
유상현이 커피 잔을 들던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다시 커피 잔을 들어 내 손에 꼬옥 쥐어주었다. 커피 잔의 온기는 내 몸속의 한기를, 찰랑거리는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몰래 숨어 있던 약간의 잠기운을 냉정하게 쫓아내버렸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후루룩,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펫이 누구야? 그리고 변태지는 혹시 그 변태지?"
나는 커피 잔을 입에서 뗀 후 반사적으로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유상현에게 나와 태지가 한때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난 변태지와 사귀었고, 변태지는 유상현에게 사랑 고백을 했고, 유상현과 난… 어쨌거나 이상 야릇, 떨떠름, 애매모호한 관계다.
"이런 이름이 또 있단 말이야? 이 부모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지은거야? 하긴, 자기 자식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름이야 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유상현의 표정과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아렸다. 난 화제 전환을 위해 유상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잽싸게 낚아채며 날카롭게 말했다.
"왜, 남의 핸드폰을 함부로 보고 그래요?"
핸드폰을 보니 변태지에게 한 통. 환에게 세 통, 집에서 두 통, 나머지는 모르는 번호들로 아마, 나와 유상현의 관계에 대한 인터뷰에 열이 오른 잡지사나 신문사 기자들일 것이 분명했다.
"미안."
이라고, 정말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말한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데 펫은 누구야? 설마 이름이 '펫'은 아닐 테고, 요즘 세상엔 강아지가 주인이 늦게까지 안 들어오면 전화하고 그러나?"
"설마요."
펫은 환이었다. 그가 내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며 ‘펫’이라는 글씨 뒤에 강아지 모양의, 핑크색 이모티콘을 앙증맞게 붙여놓았다.
"그럼… 혹시 환이야?"
난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남의 자식에게 펫이라는 애완동물을 지칭하는 단어로 부른다는 건 분명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두시였다.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나자, 유상현은 꽃과 프라다 곽을 챙겨 건네며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난 둘 다 거절하지 않았다.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다른 새벽녘 어슴푸레한 분위기의 정원을, 이슬 맺힌 밤의 청량한 공기 속에 섞인 초록 잎의 푸르른 향을 기분 좋게 느껴가면서 유상현과 나란히 걸었다. 돌다리를 하나씩 사뿐히 디딜 때마다 슬쩍슬쩍, 아슬아슬 스치는 유상현의 손 때문에 설레는 마음, 진실과 거짓, 지은서라는 여자로 인한 두려운 마음, 환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번갈아가며 심장 한쪽을 아리게 했다. 특히, 환이에 대한 미안함이.
"정말 속이고 나와도 될까요?"
"일단 만나긴 해야지. 어떻게 하면 그 녀석의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지."
"이해할 거예요. 진심을 다하면."
그가 고맙다는 듯이, 그러길 바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들기 전에 했던 유상현과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환이 유상현을 유혹한 후 자신에게로 오라는 그 말도 떠올랐다. ‘장난이겠지, 설마’라고 생각하던 찰나 유상현이 대문을 열었고 그 순간 나는 꼿꼿이 얼어버렸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사람들은 다 뭐지?
지쳐서인지 평소의 습관인지,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과자를 까먹거나 하던 중인 그들은 철커덩하고 열리는 문과 동시에 도미노처럼 쭈르륵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어 찰칵찰칵, 플래시를 터뜨리고 질문 공세를 펼쳐댔다.
"유상현 씨,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왜 열애설을 터뜨리고 홀연히 사라지신 거죠?"
"일본에 숨겨둔 애인이 있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습니다."
"두 분이 지금까지 같이 계시다 오신 건가요?"
"공식적으로 언제쯤 기자 회견을 가지실 거죠?"
"두 분 완전히 ‘핫 커플’로 떠오르신 거 알죠?"
그때, 제일 앞줄에 있던 남자가 쪼르르 유상현에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유상현의 매니저였다.
"왜 저한테도 연락도 안 했어요? 전화도 계속 먹통이고. 또 어떻게 귀국했는지 눈치 채고 이렇게 벌떼처럼 몰려들었다니까요."
그는 유상현에게 말하는 도중 슬쩍, 슬쩍 나를 훔쳐봤다. 유상현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내 귀에 속삭였다.
"이번엔 진짜 셀러브리티가 되게 해줄게."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유상현은 내 손에 들어 있는 곽과 꽃다발을 빼앗아들어 안절부절 못 하고 서 있는 매니저의 품에 던지듯 넘긴 채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기습 키스를 했다. 이미 뭉개질 대로 뭉개진 내 화장과, 결코 단정치 못한 내 머리 위로 사정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 때문에 하필이면 신고 나온 굽이라곤 전혀 없는, 다리가 짧아 보일지도 모르는—아니, 짧아 보이는—스니커즈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나를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는 강윤지 때문에… 유상현의 입술을 느낄 정신 따윈 내게 없었다.
빅토리아 베컴, 린제이 로한, 패리스 힐튼, 그녀들은 날마다 이런 플래시 세례 속에 살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들은 자신들의 파파라치 컷 속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웃고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피곤하거나, 때로는 울먹이기까지 했던. 그녀들은 분명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행복까지 반짝이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않을까? 그녀들의 일상이 내가 원하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근사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결.코.
그녀들을 알고 나서 처음으로 그녀들이 안쓰러워졌다.
(계속)